경남 고성을 다녀 오면서,

경남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함안 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을 찾았습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된 무기연당(舞沂蓮塘)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 있는 주재성(周宰成)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으로,

지난해 이곳을 찾았다가 문이 닫혀있어 되돌아 갔었는데 열려있는 문을 대하니 반갑기만 합니다.

 

 

 

무기리 주씨 고가의 솟을 삼문의 중문 위에는 충신 정려(旌閭)와 효자 정려가 나란히 걸려있어,

충신 정려는 국담이 세상을 떠난 후 충성심에 대한 공훈으로 내려진 정려로 영조가 내렸으며,

효자 정려는 이인좌의 난 때 아버지와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운 큰아들 주도복에게 1859년(철종 10년)에 내린 것으로,

주도복은 어머니 병이 위중하여 목숨이 위태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연장한 효자로 효행에 대한 포상으로 내려 졌는데,

오른쪽이 국담(菊潭)의 충신정려(忠臣旌閭)이며 왼쪽에는 아들 주도복의 효자정려(孝子旌閭)가 함께 걸려 있어 충효쌍정려문(忠孝雙旌閭門) 입니다.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가 있어, 

낮은 기단, 정면 세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대청을 깔고 양측에 방을 두었으며,

정면에는 툇마루, 측면에는 쪽마루를 내고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 천장으로 꾸렸는데,

감은재는 영조대왕의 은혜에 감읍한다는 의미로 주재성(周宰成)은 영조가 승하한 후 3년 동안 조석으로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합니다.

 

 

 

감은재 안쪽에는 중문이 있고,

안채가 자리해 있으나 문이 닫혀있어 낮은 담장 너머로 들여다 봅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으로,

맞배지붕을 한 안채는 왼쪽부터 건넌방, 안대청, 안방 부엌을 두었습니다.

 

 

 

사랑채인 감은재를 마주하고 협문인 한서문(寒棲門)이 있어 무기연당으로 들어가는데,

연당 주변에는 담장을 쌓고 협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한서문(寒棲門) 현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주 주씨 종가댁으로 주재성(周宰成)의 생가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못인 무기연당(舞沂蓮塘)으로,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주재성은 초모한 의병은 물론 관군에게도 사재로 넉넉히 음식을 제공하고 공급하니 칭송이 자자 하였는데,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관군들은 원대 복귀하는 길에 주씨(周氏) 향리에 모여,

마을 어귀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연당을 파고 당주(塘洲)를 만들었습니다.

 

 

 

연당(蓮塘)의 오른쪽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기양서원중건기념비(沂陽書院重建記念碑)와 충효사(忠孝祠)와 영정각(影幀閣)이 있어,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인 맞배지붕의 영정각(影幀閣)으로,

 

 

 

안을 들여다 보니 영정은 가리워져 있어 볼수가 없었고,

 

 

 

영정각 옆에는 1971년에 서워진 충효사(忠孝祠)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전면에 툇간을 구성한 맞배지붕의 사당으로,

 

 

 

무기연당(舞沂蓮塘)의 주인인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1681~1743)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성재(聖哉) 호는 국담(菊潭)으로 주세붕(周世鵬)의 방손으로, 주각(周珏)의 아들입니다.

어려서부터 근사록(近思錄)과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독하고 위학입교도(爲學立敎圖)와 오륜론(五倫論)을 지어 실천에 힘썼으며,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에 진출하여,

관찰사 황선(黃璿)으로부터 김해진군(金海鎭軍) 3,000명을 지원받아 영호(嶺湖)의 요새인 분치령(分峙嶺)을 방어하였는데,

전쟁이 길어지자 인근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었으나,

자신의 가산을 털어 백미 300석으로 배불리 먹이니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난이 평정된 뒤 고향에 돌아와 학문연구와 훈고(訓詁)에 전심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양무원종훈일등공신(楊武原從勳一等功臣)"이라 칭송되면서 관찰사 황선과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조정에 그를 천거하였으나 마다 하였습니다.

사후 3년후 1745년(영조 21)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1783년(정조 7) 영남 유생의 상소로 정려(旌閭)되고 이어 1788년(정조 12) 기양서원(沂陽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주석한 "용학강의(庸學講義)",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 등을 추연한 "경의집록(經義輯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예설(禮說)을 집약한 "거가요범(居家要範)" 등이 있습니다.

 

 

 

무기연당(舞沂蓮塘)의 무기(舞沂)는 논어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는 욕호기(浴乎沂) 풍호무우(風乎舞雩)에서 유래 하여,

유유자적한 생활과 풍류를 즐기며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의미 한것으로 보이며,

연당을 국담(菊潭)이라 이름하고 석가산(石假山)을 쌓은 당주를 양심대(養心臺)라 하였으며,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니 그 문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고마움을 보답하려는 병사들의 정성 였습니다.

 

 

 

무기연당(舞沂蓮塘)의 기장높은곳에 자리한 풍욕루(風浴樓)로,

정면 3칸 측면2칸의 기단이 높고 마루가 넓은 단아한 누각으로  후대에 지어졌는데,

높다란 잡석의 기단위에 민도리 양식의 "一"자형 평면이고 전퇴(前退)가 있는 홑집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의 구조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정자로 앞마루도 너른 편이고

 

 

 

앞,뒤가 트여있는 중앙의 마루는 뒷마루까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바람에 몸을 씻는 집"이란 뜻의 “풍욕루(風浴樓)”의 현판이며,

 

 

 

대청마루 벽에는 성리학의 핵심인 “경(敬)”자 편액이 걸려있어,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라"는 의미로 보여지며,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뜻입니다.

 

 

 

마루 위에는 여러 편액이 올라있어 살펴보면,

이한영제(李漢英題)의 편액을 비롯하여..

 

 

 

 

충효사집사분정기(忠孝祠輯事分定記)가 있으며,

 

 

 

풍욕루기(風浴樓記)의 편액이 있고,

 

 

 

1992년 후손(後孫) 영홍(永洪)의 한글이 혼용 되어있는 연당보수기(淵堂補修記) 편액과,

 

 

 

근차풍욕루상판운(謹次風浴樓上板韻)의 편액이 있으며,

 

 

 

조원규(趙元珪)의 풍욕루중수기(風浴樓重修記)의 편액도 볼수있습니다.

 

 

 

풍욕루(風浴樓)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푸른 향나무와 섬을 향하여 비스듬히 누운듯 노송 한그루가 있고,

곁에 있는 돌계단 아래에 옛 선비들이 갓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었다는 탁영석(濯纓石)이 있습니다.

 

 

 

무기연당(舞沂蓮塘)에서 가장 높은곳에 자리해 있으며,

마루가 트여있어 여름의 시원함을 더해주는 풍욕루(風浴樓)에서 내려와.

 

 

 

곁에있는 하환정(何換亭)으로 오르면,

하환정은 정면3칸 측면3칸의 규모로 연못쪽에 난간을 설치해 놓았으며,

동편 1칸은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둔 작지만 아담한 건물입니다.

 

 

 

하환정(何換亭)의 마루로 오르면,

 

 

 

"자연의 삶을 고난의 벼슬길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하환정(何換亭)”의 현판이 있으며,

 

 

 

하환정(何換亭)의 마루위에는 풍욕루보다 많은 편액을 볼수있어서,

행단제영(杏檀題詠)의 편액이 보이고,

 

 

 

옥산(玉山) 장석영(張鍚藎)의 근차창의운(謹次倡義韻)이 있으며,

 

 

 

옥산(玉山) 장양신(張鍚藎)의 근차창의운(謹次倡義韻)이 있어 구분을 어렵게 하며,

 

 

 

허전근(許傳謹)의 추화창의운(追和倡義韻)의 편액이 있고,

 

 

 

김양순(金陽洵)의 공화첨원(恭和添原) 편액과,

 

 

 

사간(司諫) 이육(李堉)의 근화주의사운(謹和周義士韻)의 글이 들어오고,

 

 

 

의정(義政) 김재모( 金在暮) 공화 주의사창의운(恭和 周義士倡義韻)이 있으며,

 

 

 

참봉(參奉) 이복령(李復齡)의 람금학사편운복송주의사(覽金學士長篇韻復頌周義士)의 편액,

 

 

 

이한영(李漢英)의 봉화주의사판상운(奉和周義士板上韻)이 있습니다.

 

 

 

무신창의시운(戊申倡義詩韻)의 편액이 있고,

 

 

 

하환정원운(何換亭原韻)의 편액이 있으며,

 

 

 

남고(南稿) 조운한(趙雲漢)의 근차 주의사하환정판상운(謹次 周義士何換亭板上韻)의 편액과,

 

 

 

교리 이주진(校理 李周鎭)의 봉화주의사판상운(奉和周義士板上韻) 편액이 있으며,

 

 

 

참판(參判) 이규채(李奎采稿)의 추화주의사운(追和周義士韻) 편액,

 

 

 

하환정중수기(何換亭重修記)의 편액과,

 

 

 

후손이 올린 편액으로 한글이 함께쓰인 기양유적중수기(沂陽遺蹟重修記)를 볼수 있습니다.

 

 

 

하환정(何換亭)에서 하환(何換)의 환(換)은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의 바로 그 "환(換)"으로,

何換(하환)이란 "어찌 바꾸겠느냐"는 의미이니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과 같은 맥락으로서,

은둔과 절개를 상징하는 문구로 사용된 것으로 주변 에서의 세 번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끝내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던 주재성(周宰成)의 거취였으며, 또한 조선선비의 표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13mx20m크기의 국담(菊潭)에  4m 방형크기의 모래섬을 양심대(養心臺)라 하였는데,

새어나오는 물을 수원으로 하고 이후 주재성(周宰成)은 연못 이름으로 국담(菊潭)이라 호를 삼고,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사철 모습이 변하는 국담(菊潭)에서 우주를 보고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방형(方形)에 가까운 국담(菊潭)의 연당은 산석(山石)으로 호안(護岸)을 쌓되 이급(二級)으로 하여 석축의 높이를 완화시켰고,

중앙에 당주 하나를 모았는데 산석을 써서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석가산을 쌓아 양심대(養心臺)라 불렀습니다,

 

 

 

국화꽃으로 가득한 연못으로 국담(菊潭)이라 하고 작은섬인 양심대(養心臺)가 있어,

그곳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의 암각을 볼수 있는데,

백세청풍(百世淸風)은 백대(百代)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백세(百世)는 "오랜 세월" 또는 "영원함"을 뜻하고  청풍(淸風)은 맑고 드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을 비유 한다고 하여,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의미하며 일편단심 조선왕조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대부가의 지조를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특징을 살펴볼수 있는 곳으로,

선비 자신의 힘이나 의도가 아닌 감사와 보답의 의미로 군사들의 힘으로 연못과 주변을 조성해주어 의미가 남다르며,

후손들의 노력으로 선비의 철학이 그대로 담긴 더욱 아름다운 전통정원으로 남게 되었으며,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정진한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의 철학을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문을 열어 일반인에게 돌아볼수 있게 개방되어 다행인 곳으로

경남을 대표하는 전통정원 함안의 "무기연당(舞沂蓮塘)"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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