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의 문화재 탐방에서,

충청북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괴산(槐山) 고산정(孤山亭) 및 제월대(霽月臺)를 찾았습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제월리에 있는 고산정으로 오르는 초입의 주차장에서,

조선시대의 경승지 제월대의 커다란 표지석으로 볼수 있으며,

 

 

 

주차장의 한쪽에는 "홍명희 문학비"가 있어,

 

 

 

역사소설 "임꺽정"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홍명희문학비(洪命喜文學碑)로,

소설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의 문학비가 자리하고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 해방후 월북하였던 인물로,

비석에는 신영복( 申榮福)의 필체로 각인되어 있고 돌기둥이 비석 주위로 둘러서 있습니다.

 

 

 

문학비 앞에는 월북하였던 벽초(碧初)와,

그에게서 비롯된 통일에 대한 시대적 갈망들을 찾을수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고산정을 향합니다.

 

 

 

고산정가는 길에있는 제월대(霽月臺)의 절벽 아래를 흐르는 아름다운 괴강의 모습으로,

제월대는 고산정 부근의 절벽 부분으로 달천 양편에 흩어진 명승지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이곳에도 주자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고산구곡(孤山九曲)이 있어,

제1곡은 고산정(孤山亭), 제2곡은 황니판(黃泥坂), 제3곡은 관어대(觀魚臺), 제4곡은 은병암(隱屛岩),

제5곡은 제월대(霽月臺), 제6곡은 창벽(蒼壁), 제7곡은 영객령(迎客嶺), 제8곡은 영화담(映花潭), 제9곡은 고산정사(孤山精舍) 입니다.

 

 

 


조선 후기의 정자로 충청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알려져 있는 고산정(孤山亭)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 목조기와 집으로 사면 모두를 개방하고 평난간을 둘렀으며,

정자는 아래쪽으로 맑은 냇물을 바라다 볼 수 있도록 벼랑 위에 세웠습니다.

 

 

 

1596년(선조 29)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고산정사(孤山精舍)라는 별서(別墅)를 지어 기거하였으며,

그 안에 장송 수백 그루를 심고 정자를 지었기 때문에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르다가,

광해조에 이르러 어려운 정치를 피하여 이곳으로 낙향하여 "고산정(孤山亭)"이라 개칭 하였습니다.

 

 

 

 

정자의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부분적으로 보수한 흔적이 여러곳에 보이며,

 

 

 

마루로 오르는 디딤돌은 정자의 뒤편에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의 현판으로 이원(李元)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앞이 훤하게 트인 마루로 올라봅니다.

 

 

 

고산정(孤山亭)의 마루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호산승집(湖山勝集)의 현판으로,

1606년(선조39년)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며,

 

 

 

조선 인조 때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올 때 유근(柳根)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시문(詩文)의 교류가 두터웠는데,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1609년(광해군 1)에 쓴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의 편액으로 명문, 명필로 이름이 높습니다.

 

 

 

그 외에도 고산정(孤山亭)에는 사부사(謝副使)가 지어 보낸 일명 고산팔경(孤山八景)이라고도 하는 "만송정팔경시(萬松亭八景詩)" 가 있고,

유근이 1606년 명조 사신 주지번과 부사 양유년 일행, 그리고 1609년에는 웅화 일행과 주고받은 시문등이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충주호를 향해 흐르는 달천의 풍경으로,

 

 

 

유근(柳根)의 "고산시(孤山詩)"로 7언율시로 72구(句)의 장편 시(詩)중 한 부분입니다.

浣花溪似暎花潭      완화계(浣花溪) 같은 영화담(暎花潭),

蒼壁干霄挿渺漫      창벽(蒼壁)은 구름을 뚫고 아스라이 솟아 있다.

霽月光風在懐袖      제월대(霽月臺)의 비개인 풍광이 가슴 속에 남아 있고

林翁溪友交巖巒      임포(林逋) 같은 산골 친구들과 바위를 벗 삼는다.

有時棹舟或策蹇      때로 배를 젓거나 당나귀를 채찍질하여 들어가니,

嶺上歡迎興非淺      고개 마루에서 환영하느라 흥에 겹다.

 

 

 

고산정(孤山亭)은 성불산과 달천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을 자랑하는 곳으로,

맑은 냇물이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벼랑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자의 동남에는 제월대(霽月臺) 암반이 있어서 정자 남쪽에 전개된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의 주인 유근(柳根,1549∼1627)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으로 황정욱(黃廷彧)의 문인이며,

1570년(선조3) 두 시험을 거쳐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장원하고,

157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하였으며,

같은해 일본의 중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문장이 뛰어났으므로 선위사(宣慰使)에 특임되어,

문장과 재능을 발휘하여 겐소 등이 탄복 하기도 하였습니다.

1591년 좌승지로서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文才)를 아끼는 선조의 두둔으로 화를 면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으며 좌승지·예조참판을 거쳐 5도병마부체찰사가 되었습니다.

 

 

 

1593년 도승지로 경성안무사(京城安撫使)가 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이어 한성부판윤에 올라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로 명나라에서 들어오는 군량미의 수송을 담당하였으며,

그 외에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으며,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4년 난중에 임금을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대제학에 이어 좌찬성에 올랐습니다.

 

 

 

그후 광해군때 대북파가 국정을 장악하자 사직하고 괴산에 낙향하여 은거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시골로 피했다는 죄로 관작이 삭탈 되었다가,

1619년 복관되었으나 일체 관직에 나서지 않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자,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通津)에서 졸하였습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에 뛰어났으며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문정이며 저서로는 "서경집"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외교에 능했으며,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일을 하였고 문장과 시(詩)에 뛰어 났으며,

왜란과 호란의 와중에 있었던 유근(柳根,1549∼1627)을 돌아 볼수있는 곳으로,

충북 괴산의 경승, 고산정(孤山亭) 및 제월대(霽月臺)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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