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장자 문화재 탐방에서,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 정자인 무안(務安) 식영정(息營亭)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인 "식영정(息營亭)"으로,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 되었으며,

교촌리 "유산정", 청계면의 "화설당"과 함께 무안의 3대 정자로 꼽히기도 하는곳 입니다.

 

 

 

정자로 오르는 식영정(息營亭) 아래에는,

초가지붕의 아담한 사각정자가 있어 찾은이에게 쉼터로 마련되어 있으며,

 

 

 

식영정(息營亭)은 둥글게 휘감아도는 영산강의 정취를 즐길수있는 곳에 자리해 있어,

꿈여울에 울려퍼지는 갈대피리 소리라는 뜻으로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이 아래에 있으며, 

몽탄강(夢灘江,꿈 여울)으로도 불렀던 이곳은 왕건과 견훤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어,

후삼국 때 왕건군과 견훤군과의 한판 싸움에서 왕건이 군막에서 잠이 들었는데 백발노인이 왕건 앞에 나타나,

"앞으로 대업을 이루려는 장군이 일기도 모르고 잠만 자면 되는가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빨리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있으면 견훤군이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견훤군을 치면 장군은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라고 전해주어,

이 현몽에 의해 왕건군이 승리하게 되어 몽탄강(夢灘江)이라는 이름을 얻은곳이며 "S"자로 굽이쳐 흐른다고 곡강(曲江) 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자의 주변에는,

510년이 넘은 수령의 노거수 팽나무와 푸조나무 8그루가 식영정(息營亭)을 감싸듯 자리해 있어,

더욱 빼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으로,

 

 

 

호남에는 식영정이 두군데가 있어,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유명한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의미로,

가운데에 "그림자 영(影)"자를 썼으며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로 가사문학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반면 무안의 식영정(息營亭)은 "경영할 영(營)"자를 썻으며,

이곳은 정치가들이 미래를 경영하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정자 옆에는 "통정대부좌승지 한호나주임공연유허비(通政大夫左承旨 閒好羅州林公堧遺墟碑)"의 비석이 자리해 있고,

 

 

 

무안(務安) 식영정(息營亭)은,

1630년 병자호란에서 돌아온 한호(閑好) 임연(林煉, 1589~1648)이 여생을 보내고 강학 소요처로 지은 정자로,

그의 호인 "한호(閑好)"처럼 한가로움을 좋아 한다는 취지로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식영정(息營亭)으로 불렀다고 전해 집니다.

 

 

 

정자는 전면으로 오를수 있도록 되어있어 자연석을 이용한 초석과 디딤돌을 볼수있고,

현재의 건물은 1900년대 초반에 중건한 건물이며  1900년대에 불에 타서 1983년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팔작지붕 입니다.

 

 

 

처마 아래에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현판이 있어,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날 뛴다"라는 의미로,

유교에서는 이를 자기가 갖고 있는 내재적 생명력을 최고조로 발휘한다는 뜻에서 "연비어약"이라 하고,

이는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날뛰듯이,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감춰진 힘과 권능을 최고조로 발양하게 된다는 의미라 합니다.

 

 

 

 연비어약의 현판 안쪽 문위에 "식영정(息營亭)"의 현판이 보이고,

 

 

 

식영정(息營亭)의 편액들을 찾아 봅니다.

 

 

 

자료에는 식영정(息營亭)에서 조홍립, 최희량, 진경문, 나해봉, 양천운, 홍서봉, 신민일, 조행립, 이식, 장유, 이명한, 유계 등,

수많은 선비들이 식영정에 관련된 글이나 흔적을 남겼다고 하는데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편액은 하나만 올려져 있습니다.

 

 

 

식영정(息營亭)운 호남정자의 전형인 가운데 방을두고 마루를 두른 구조로,

 

 

 

마루방을 두고 삼면에 들어 올릴수 있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밝은 편이며,

 

 

 

마루방의 후면은 겨울의 찬바람을 막으며 2중구조로 보온성과 실용을 살린 벽장이 있어,

 

 

 

윗쪽의 작은 벽장도 살펴보고,

 

 

 

아래 벽장에는 무엇인가 보관을 하고 있어,

 

 

 

그림과 함께 한글로 쓰여진 시판이 보이고,

 

 

 

식영당기(息營堂記)의 편액도 보여,

마루 에서는 시판과 중수기 등의 편액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였는데,

편액들이 창고에서 보관만 되고 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식영정(息營亭)의 마루에서 영산강의 정취를 느껴 봅니다.

이곳은 영산강과 그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으며,

임연(林煉)의 증손으로 동사회강을 지은 문인학자인 노촌 임상덕(林象德1683~1710)이 제현과 교류하는 등,

무안 몽탄 이산리의 나주임씨 강학교류 공간 이었으며 대를 이어가면서 교류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곳입니다.

 

 

 

식영정에서 노래한 수군절도사 유절도(柳節度)의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息營庭畔夢江頭    식영정 뜰 가에서 강두(江頭)를 꿈꾸니

蘆荻花開屬晩秋    억새꽃 피어 있어 때는 만추(晩秋)에 속하였네.

多少白鷗應問我    많은 백구(白鷗)들이 내 안부 물을 터인데

一千里外客東州    일천리 밖에 나그네는 동주에 있다 하시오

 

 

 

식영정(息營亭)의 주인 한호(閑好) 임연(林煉, 1589~1648)는 조산중기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16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가,

이후 42세까지 영암군수, 진주목사, 원주판관, 좌우승지를 거쳐 남원부사 등을 지냈으며,

1630년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다" 며,

산수를 찾아 선유하고  무안에 입향 한 이후 강학소요처로 식영정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고,

1642년 이괄의 난에도 공을 세웠던 여양인(驪陽人) 섬호(剡湖) 진경문(陳景文)이 식영정을 보고 그의 "息營亭"이라는 시(詩) 입니다.

천안(天眼)으로 바야흐로 땅의 그윽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공(公)은 전세(前世)에 바로 신선(神仙)이었음을 알겠도다.

강은 을자(乙子)를 나뉘어 바다가 멀고

산은 구질(龜秩)을 끌어당겨 반은 물가로 들어섰네

구악(鷗岳)은 모두 한호(閒好)의 계사(契社)를 이루고

연하는 오래도록 오가는 배에 속하였구나

영웅(英雄) 호걸(豪傑)의 승사(勝事)는 무수히 많았으니

오늘날 고풍(高風)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련지

 

 

 

식영정은 경영하는 이들로 정치하는 사람들,

또는 정치권에서 물러난 사람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치나 사회에 대해 논의하는 정자라는 의미로,

왕건과 견훤에 관한 전설이 있는 몽탄강(夢灘江)가에 자리하여,

강학과 교류의 공간으로 많은 문인 묵객이 찾았던 곳으로,

무안을 대표하는 영산강의 빼어난 정자 무안(務安) 식영정(息營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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