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의 문화재 탐방에서,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상계리에 있는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를 찾았습니다.

 

옥천군 옥천읍 상계리에 있는 옥천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로,

사마소 인근에는 시인 "정지용 생가"와 "육영수여사 생가"가 가까이 있어 함께 찾아 봄직합니다.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옥천의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는,

옥천지역의 대표적인 유림 집합소 입니다.

 

 

 

사마소(司馬所)로 들어가는 솟을 외문에는 이곳의 개방시간을 안내해두었고,

 

 

 

옥천의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로,

이곳의 명칭이 옥주사마소라 부르게 된 것은 옥천군이 고려시대 충선왕 5년(1313)에 주로 승격시켜,

"옥주(沃州)"라고 부르게 한 데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옥주(沃州)라는 이름은 태종 13년(1413)에 옥천이라고 개칭할 때까지 불리워 졌다고 하며,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대개 사마시에 합격한 자가 50인 이상 되는곳에 설치 하였습니다.

 

 

 

사마소(司馬所)의 마당 한켠 작은 화단에는,

겨울의 길목에서 국화가 진한 향을 풍기며 맞아줍니다.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의 현판으로,

사마소(司馬所)란 16세기 초 훈구파들의 유향소 장악에 대한 반발로,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들이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세운 학문ㆍ교육기관으로,

1658년송시열이 쓴 『사마안(司馬案)』에 따르면 옥천 지방의 소과(小科) 이상의 급제자는 165인에 이르렀다고 하며,

처음에는 이들의 친목도모와 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 등으로 그 고장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점차 수령의 통치에 간섭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잡아다 벌을 주는 등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의 규모는 정면 5칸, 옆면 2칸 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 건물로,

앞면 4칸에 툇마루를 두고, 그 뒤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습니다.

 

 

 

마루에는 방문객들의 흔적을 남기는 방명록이 보이고,

사마소(司馬所)는 현재 우리나라에 단 3곳이 남아 있는데,

괴산의 "청안 사마소"와 "경주사마소" 그리고 옥천의 옥주사마소로,

이곳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는 독립된 건물로 그 원형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합니다.

 

 

 

두칸으로 이어지는 방의 내부를 들여다 봅니다.

 

 

 

안쪽의 방에서는 벽장 윗쪽에서 태극기의 모습도 볼수 있고,

 

 

 

온돌방 옆에는 2칸 규모의 마루방으로 앞쪽은 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내었으며,

뒤쪽으로도 문을 크게 두고있어 마루는 밝은편 입니다.

 

 

 

사마소(司馬所)는 1480년 연산군때부터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했는데,

이들은 남종과 여종등을 두고 일을 시켰으며 뒤에는 서원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폐단을 보이기도 하여,

조정에서는 이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종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좀처럼 폐지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는 그런 의미에서 향교와 함께 구읍이 유림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문화재 이기도 합니다.

 

 

 

사마소(司馬所)의 마루방에서는 옥주 사마소 중건기(沃川 司馬所 重建記)외 여러 편액들을 볼수있어,

본래의 건물은 송시열(宋時烈)의 "의창중수기(義倉重修記)"에 따르면,

1654년(효종 5)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창고 건물이었던,

의창 건물을 헐어서 세웠다고 하며,

 1674년(현종 15)과 1893년(고종 30)에 중수 하였슴을 좌의정을 지낸 송근수(宋近洙)의 중수기를 통하여 알수있는데,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는 300년 이전부터 몇 차례의 중수를 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루위에는 상량의 글도 볼수있는데,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에는 관성사마안(管城司馬案), 향약계안(鄕約契案), 옥천군향약계규약(沃川郡鄕約契規約) 등,

조선시대 지방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문서들이 여러 편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마소 앞에서 보아 왼쪽에는 부엌도 딸려있어,

 

 

 

부엌문에 달려있는 문고리가 특이한데,

원래의 것은 아닌듯 하며 빠진부분이 있어서 문에 구멍을 내어 앙증맞게 걸어두었습니다.

 

 

 

나무문을 열고 소박해 보이는 사마소의 부엌을 들여다 봅니다.

 

 

 

지금의 옥주사마소는 후손들과 유림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회합을 갖는 사마계가 조직 운영되고 있다고 하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한부분을 살펴볼수 있는 "사마소(司馬所)"로,

남아 있는 사마소(司馬所) 가운데 원형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 곳으로,

충북 옥천의 문화재 "옥주 사마소(沃川 司馬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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