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을 여행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전봉준 유적,

"정읍 전봉준 유적(井邑全琫準遺蹟)"을 찾았습니다.

 

사적 제293호로 지정된 전봉준 유적(全琫準 遺蹟)으로,

이곳은 민중 지도자 일명 녹두장군인 전봉준(全琫準) 이 동학운동(東學運動)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봉준 고택(全琫準 古宅) 앞에는,

또한채의 초가가 있어 안내문이 없어 용도는 알수없으나 관리사로 보이며,

 

 

 

관리사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담 위에 짚으로 엮은 이엉을 덮은 돌담을 쌓은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로 향 합니다.

 

 

 

전봉준 고택 앞에는 마을의 옛공동 우물이 있고,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의 입구는,

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을 단 사립문이 소박함을 느끼게 하고,

 

 

 

장내리 조소(鳥巢)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全琫準)의 옛 집으로,

전형적인 초가 3칸의 돌담집으로 남쪽을 향해 터를 잡았는데,

전봉준(全琫準)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 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陽橋里 양간다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하며,

갑오년(甲午年 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按 使 李容泰)가 내려와 동학교인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질러 버렸는데.

이 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이론(異論)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補修)를 하면서 해체(解體)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上樑文)에,

무인(戊寅) 2월 26일(高宗 15年 1878) 세운 것으로 되어 있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 있는 폐옥(廢屋)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의 왼쪽방의 앞에는 아궁이의 모습이 보이고,

 

 

 

고가(古家)는 동쪽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 순서로 배치되어 있지만..

원래 방 1칸, 광 1칸, 부엌 1칸인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으며,

서쪽의 끝방은 살림살이 등을 넣어 두는 곳간으로 바꾸어 만들었는데,

 천장은 모두 연등천장(椽背天障)이며 큰방과 윗방은 앞에 툇마루를 놓았는데 장지문으로 통하며 부엌에는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습니다.

 

 

 

윗방과 끝방의 문짝에서도 소박함이 느껴지고,

 

 

 

자그마한 끝방부터 들여다 보면,

단출한 가구에 소박하게 꾸며 두었는데 전봉준(全琫準)의 모습도 보입니다.

 

 

 

전봉준(全琫準, 1854~ 1895)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북접의 지도자로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 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으며,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 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켰는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온건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자 농민군의 북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던 인물로,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봉준(全琫準)이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894년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는 모습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전봉준의 눈빛은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당시의 전봉준은 포박당하는 과정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저렇게 가마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전봉준은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운명시(殞命詩)"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는 올바름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위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의 큰방과 연결이 되는 "윗방"의 모습이며,

 

 

 

큰방 이라고 하지만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방으로,

 

 

 

큰방 옆에는 아담한 부엌이 있어,

부엌의 전후벽에는 널문을 달아 필요한 때에는 잠글 수도 있도록 되어 있으며 옛날 시골살림을 연상케 합니다.

 

 

 

방앞 쪽마루 위에는 바람을 막기위해 외피를 씌운 옥외용 제등(提燈)인 초롱의 모습도 보이고,

 

 

 

본채를 마주하는 곳에 창고로 보이는 초가의 작은 건물이 있어,

출입문으로는 한 짝의 열매문을 달아두었는데..

 

 

 

안을 들여다 보니 화장실입니다.

 

 

 

재래식 화장실 이지만 제법커서,

창고와 잿간을 겸한 변소(草家)로 보입니다.

 

 

 

고종 31년(高宗 1894)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 당시 전봉준(全琫準 1854~1895)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원래 흙담 3칸 집으로 당시 우리나라 가난한 농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이며,

고택(古宅)을 보존하기 위하여 정읍시에서 1974년에 국비와 군비로 크게 수리한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는데 일반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위치하여,

이에 이어서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인데 이 집은 그 순서를 무시하고 있는데,

끝방은 방(房)으로 보다는 살림살이 등 속을 넣어두는 고방(庫房)으로 사용된 것으로,

큰방과 윗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장은 두 가지 다 연동(連動) 천장이며,

두 방의 전면에는 퇴를 놓았으며 대살문으로 드나드는 끝방 전면에 반쪽에는 짧은 담을 두르고 이곳에 땔나무 등을 두었으나,

이것이 본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를 나와 전봉준 고택지에서 약 500m 떨어진 소나무 숲에 있는 전봉준의 단소(壇所)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제단과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1994년부터 연차적으로 정비하여 유해가 없는 허묘(虛墓)를 조성하고, "전봉준장군운명시비"도 세웠는데,

동학혁명 지도자인 전봉준은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어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에게 넘기지 않아서 시신은 수습되지 못해,

한성에서 사형당한 전봉준의 시신은 현재 단국대학교 야산에 버려진것으로 알려져 있어,

현재 정읍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동학지도자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입니다.

 

 

 

단소(壇所)앞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 관련 민요(동요)의 시비가 있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동학농민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며,

다른 설로는 팔왕설이 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으로,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널리 불리는 동요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의 동요라고도 볼수도 있습니다.

 

 

 

전봉준(全琫準)의 허묘 앞에는 비석이 있어, 

"갑오 민주 창의 통수 천안 전공 봉준 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 이라 새겨져 있으며,

단비의 이름은 사학자 김상시(金庠基, 1913~1993) 박사가 지었습니다.

 

 

 

전봉준(全琫準:1855~1895)의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은 전철로(全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으로,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하며,

전창혁(全彰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는 향반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즉 잔반 출신으로 보입니다.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하였고,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하며,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 東谷) 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습니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는데,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합니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는데,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어,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여,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는데,

이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하여,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는데 이것이 고부민란으로,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하였고,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여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는데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하여 1894년 3월 하순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습니다.

전봉준은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여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 되었습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고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 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 하였습니다.

이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오게 되어,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 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여,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여,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 되었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으나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조선말기 탐관오리에 맞서 민중봉기인 갑오 동학(甲午 東學) 혁명(革命)의 불씨를 일으켰으며,

조선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농민운동으로 역사에 남긴 전북 정읍의 전봉준 유적(全琫準 遺蹟)으로,

전봉준 고가(全琫準 古家)와 전봉준 단소(全琫準 壇所) 탐방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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