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정자 문화재 탐방에서,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후기의 정자 "창암정(蒼巖亭)"을 찾았습니다.


창암정(蒼巖亭)은 풍산홍씨 2대조인 홍애(洪崖) 홍간(洪侃, ?~1304)의 정자로,

홍간(洪侃,)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풍산홍씨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의 아들이며 시문에 능 하였습니다.

 

 

 

신성리 도로변의 절벽위에 자리한 창암정(蒼巖亭)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서 다리를 건너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풍천면 기산리를 지나서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안동시 풍천면 구호리 쪽으로 다시 가다보면 좌측 절벽 위에 창암정이 남동향으로 자리해 있으며,

 

 

 

길옆 절벽 아래에 2000년 10월 21일 건립한  "창암정제영(蒼巖亭題詠)" 시비가 있어,

江畔釣魚穿細柳      강가에선 고기 낚아 버들에 꿰고

隴頭收秫䭾嬴牛      밭두렁에 차조 거둬 여린 소등에 실었네.

歸來自生涯足        시골에서 사는 삶이 이만하면 족하니

催釀黃花賞九秋     국화주 익었거던 가을 경치 구경가세.

- 홍애(洪崖) 홍간(洪侃) 선생 짓고 근원 김양동 쓰다 -

홍간(洪侃)의 창암정제영(蒼巖亭題詠)의 시로 미루어 보아 창암정은 홍간이 살아 있을 때에 있었슴을 알수있고,

 

 

 

도로 건너에는 풍산홍씨 시조 묘역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어,

풍산홍씨 시조는 홍지경(洪之慶)이며 창암정(蒼巖亭)의 주인 홍애(洪崖) 홍간(洪侃)의 아버지 이기도 합니다.

 

 

 

창암정(蒼巖亭)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 보았지만,

정자로 바로 오를수 있는 길은 도로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창암정(蒼巖亭)아래,

절벽의 오른쪽에 암벽에 새겨진 흰색의 글씨가 두곳이 있어,

 

 

 

왼쪽의 "풍산홍씨 세장지지(豊山洪氏世葬之地)"로,

풍산홍씨 문중의 홍중묵(洪重黙)이 시조와 조상들을 추모하기 위해 새긴 글씨로,

해서로 세로 방향 두 줄로 새겨져 있어 풍산홍씨 세장지지 암각서는 조선시대의 분묘 조성 풍습을 엿볼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한 문중의 묘를 동일한 지역에 조성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성씨의 명칭 뒤에 세장지지(世葬之地) 등의 글자를 붙여 새겼습니다.

 

 

 

오른쪽에는 가로 90㎝, 세로 140㎝ 정도의 바탕에 세로 방향 다섯 줄로 새겨져 있는데,

"古豊南申城浦我洪氏  三世墓源遠流長不崩  益固後孫嶺左御史行  世孫講書院左贊讀樂純  銘石 壬午三月"라는 글씨로,

"옛 풍남 신성포 우리 홍씨 삼세의 묘, 아득한 근원은 장구히 흘러와 무너지지 않고 더욱 굳건하네.

후손 영좌어사행세손강서원좌찬독 낙순이 돌에 새긴다. 1762년 3월" 이란 의미입니다.

 

 

 

창암정(蒼巖亭)으로 오르기 위해 정자 아래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야 하며,

 

 

 

마을에서 왼쪽으로 나있는 제법 너른 산길을 잡아 오르다 보면,

 

 

 

길이 좁아지며 창암정(蒼巖亭)이 모습을 나타 내는데,

수목이 울창해지는 한여름에는 이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창암정(蒼巖亭)은 홍간(洪侃)이 동래현령 재임 시에 시조 선형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 하였다고 하며,

창암정의 내력은 1994년 11월 풍산홍씨대종회 명의로 게판된 "창암정 중수기(蒼巖亭 重修記)"에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어 내용을 살펴보면,

“홍애공이 정자를 지은 후 화재로 소실되어 한 칸의 모옥(茅屋)을 지어 여러 해를 내려왔다.

그 후 영조 25년(1749)에 세계(世契)가 중심이 되어 경향 각지 제종인(諸宗人)의 협조를 받아 1년 남짓 공사 끝에 복원하였다.

이듬해인 1750년 3월 정자 아래 명사(明沙)에 후손들이 운집하여 중건 잔치를 성대히 하였다.

1962년과 1981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고, 1994년 6월 4일 중수가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창암정(蒼巖亭)의 내력을 알수 있습니다.

 

 

 

정자는 사방이 열린 마루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누각 형식의 정자로,

별도의 방을 들이지 않아 이 정자는 여름용이라 할 수 있을 것으로,

가까운 집에서 기거하다가 올라와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측면 3간, 정면 4간 구조의 팔작지붕이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가 통상의 경우보다 아주 가까운 편으로 정자의 마루방은 칸수에 비해 그리 넓은편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며,

기둥과 판자에는 빠짐없이 주사칠이 되어 있으며 주사는 칠한지 오래 된 탓에 색감이 탁한 편이고,

천장의 서까래 사이에는 백토칠이 되어 있는데 주사칠된 서까래 사이에서 백토의 흰색은 더욱 선명해 보입니다.

 

 

 

창암정(蒼巖亭)의 현판이며,

 

 

 

창암정(蒼巖亭)의 주인 홍간(洪侃)의 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지경(之慶)으로,

1266년(원종 7)에 민지(閔漬)가 장원하였던 과방(科榜)에 함께 등제하여 벼슬이 비서윤(祕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으며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별세 하였습니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아,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 櫟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하였는데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허균(許筠)도 ≪성수시화 惺叟詩話≫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저서에 12대손홍방(洪霶)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이 있습니다.

 

 

 

창암정(蒼巖亭)의 편액을 찾아 보지만,

현판은 하나만 남아 있는데  모두 훔쳐가 버리고 달랑 하나 남은 현판에는 갑술년 한여름에 후손인 석호가 지은 글이 남아 있어, 

정자의 내력을 살필수 있는 기문이나 중수기 등의 현판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정자의 초석은 크고 넓적한 자연석을 썼는데 정자의 규모나, 기둥의 굵기에 비해 볼 때 큰편이며,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초석을 둔 정자의 아랫쪽을 살펴 보다가,

 

 

 

오른쪽 마루 아래에서 새둥지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되어,

이곳 창암정(蒼巖亭)으로 들어올때 독수리로 보이는 커다란 새마리가 정자쪽에서 황급히 날라 가길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느정도 비를 피할수 있는 정자의 마루아래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보금자리를 만들었는데,

새들은 보통 봄에 새끼를 낳는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겨울인 2월 임에도 벌써 갓 태어난 새끼한마리가 태어나 입을 벌리고 있어,

맹금류는 보통의 새들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서둘러 이곳을 나와주어야 겠다고 여겨 집니다.

 

 

 

창암정(蒼巖亭)의 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으로,

광산천 건너에 풍산홍씨 시조 묘역임과 사당이 저만치 들어 옵니다. 

 

 

 

홍애(洪崖) 홍간(洪侃)의 시(詩) 설(雪) 입니다.

五雲深處訪壺公(오운심처방호공)  오색 구름 깊은 곳에 호공 찾던 것 기억하노라

頃刻春光滿海東(경각춘광만해동)  어느새 봄빛이 바다 동쪽에 차네

記得爛銀堆上月(기득란은퇴상월)  이 찬란한 은 무더기 위 달빛에

五雲深處訪壺公(오운심처방호공)  오색 구름 깊은 곳에 호공 찾던 것 기억하노라


豈知身在畫圖間(기지신재화도간)   제 몸이 화폭에 담긴 줄 모르네

晚來江上數峯寒(만래강상수봉한)   날 저문 강마을 두 서넛 차운 산

片片斜飛意思閑(편편사비의사한)   하늘하늘 비껴 내려 사뭇 한가로와

白髮漁翁靑蒻笠(백발어옹청약립)   머리 센 어옹이사 도롱삿갓 쓰고

豈知身在畫圖間(기지신재화도간)   제 몸이 화폭에 담긴 줄 모르네

홍간(洪侃)의 시집 홍애유고(洪崖遺藁)에서.

 

 

 

홍간(洪侃)의 또다른 시(詩) 孤雁行(고안행)으로 "짝 잃은 기러기 노래" 입니다.

蘆花索漠風霜晩3 (노화삭막풍상만)                    쓸쓸한 갈대밭에 늦가을 바람서리만 차구나

五候池館春風裡 (오후지관춘풍리)                     높은 집 연못엔 봄바람 솔솔 불어

微波粼粼鴨頭水 (미파인린압두수)                     잔잔한 푸른 물결 반짝반짝 빛나네.

闌干十二繡戶深 (난간십이수호심)                     열두 난간 화려한 문 깊기도 한데

中有蓬萊三萬里 (중유봉래삼만리)                     그 가운데 봉래산(蓬萊山)은 아득한 삼만리.

彷徨杜若紫鴛鴦 (방황두약자원앙)                     붉은 원앙새는 향초 사이를 떠돌고

倚拍芙蓉金翡翠 (의박부용금비취)                     금빛 비취새는 연꽃 속에 깃드네

雙飛雙浴復雙栖 (쌍비쌍욕부쌍서)                     언제나 쌍쌍으로 짝지어 다니면서

綷羽雲衣恣遊戱 (쵀우운의자유희)                     비단 깃 구름 옷으로 마음껏 노니네.

君不見十年江海有孤鴈 (군불견십년강해유고안)   그대는 보지 못했나, 강해의 십년 외기러기를

舊侶微茫隔雲漢 (구려미망격운한)                    옛 짝은 아득한 저 은하수 너머에 있다네

顧影低昻時一呼 (고영저앙시일호)                    오르내리면서 때때로 제 그림자 불러 보건만

蘆花索漠風霜晩 (노화삭막풍상만)                    쓸쓸한 갈대밭에 늦가을 바람서리만 차구나

 

 

 

창암정은 건물의 양식면에서는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정자의 기능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정자 건축의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하며,

절벽바위 위에 올라앉은 정자는 길에서 바로 보이지만 자연 속에 들어가 있어 인적이 드믄탓에,

편액등의 도난이 있을 정도이며 맹금류의 새가 보금자리를 정할 정도 입니다.

풍산홍씨 선대의 유지가 남아 있는곳으로,

경북 안동의 정자 창암정(蒼巖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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