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을 여행하면서,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으로,

"설성(雪城)" 혹은 "세류성(細柳城)"이라고도 불리웠던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을 찾았습니다.

 

사적 제397호로 지정된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은 조선조 500여년 간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던 곳으로,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초대 병마절도사인 마천목 장군이 축조한 것이며 설성(雪城)이라고도 합니다.

 

 

 

모두 복원은 되지 못하였 지만,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의 배치를 살펴봅니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을 찾았을때,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주변에는 발굴조사를 하고 있어서,

모양으로 보아 병영성(兵營城) 주변의 조선시대의 해자(垓字)와 함정(陷穽)의 유구를 조사하고 있는듯 합니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남문인 진남루(鎭南樓)를 통하여 병영성으로 들어가 봅니다.

 

 

 

진남루(鎭南樓)를 들어서면 제법 너른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의 모습이 펼쳐 지는데,

원래 전라도의 군영은 광주 송정 부근에 있었으나 해안지역의  왜구출몰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조선 태종 때 강진땅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을 축조한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인 마천목(馬天牧) 1358(공민왕 7)∼1431(세종 13)으로,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1381년(우왕 7) 산원(散員)에 처음 제수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조 초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으며,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1399년(정종 1)에 상장군(上將軍)에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그리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는데,

마천목에게 내려진 공신 녹권과 교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1408년 11월에는 회령군 겸 중군총제(會寧君兼中軍摠制)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9월 감순청(監巡廳) 재직 중에 전리(典吏) 고을귀(高乙貴)를 치사(致死)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청죄(請罪)를 받았으나,

태종의 배려로 곡성(谷城) 유배에 그쳤으며 그 해 10월에 십일도도절제사(十一道都節制使)를 설치함에 따라 전라도 도절제사에 복직되었습니다.

1411년 1월 각위절제사(各衛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龍騎侍衛司節制使)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 판나주목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判羅州牧使)로 파견되었으며 1414년에 장흥군(長興君)으로 개봉(改封)되었습니다.

1416년에는 도총제(都摠制)에 개수되었다가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년 2월에 내시위절제사(內侍衛節制使)가 되었으며,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좌우패(左右牌)를 좌우금위(左右禁衛)로 개편하면서 우금위절제사가 되고, 그 달에 장흥군에 제수되었으며,

1423년 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지냈습니다.

1424년 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곡성현으로 내려가 어머니 상을 치렀고 1428년 7월장흥군에 복직되었다가,

이듬해에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했으나 도리어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부원군으로 졸하였습니다.

성품이 광심(廣深: 너그러우면서 마음이 깊음)하고 순근(醇謹: 온순하면서 근신함)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입니다.

 

 

 

남문인 진남루(鎭南樓)로 오르는길에는 노거수 소나무가 늠름하게 서있고,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성문 밖에 반원형(半圓形)이나 삼각형으로 축성된 작은 성으로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리는 옹성(甕城)을 내려다 봅니다.

옹성(甕城)에는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어 성문을 호위하거나 방어를 강화할 때 유용하게 쓰인 효율적인 구조입니다.

 

 

 

진남루(鎭南樓)는  본래의 이름은 초루(焦樓)였으며,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70㎡의 중층 구조로 3층 높이로 이뤄진 전라병영성의 정문격인 누로,

웅장하며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1369-1439)가 지은 진남루(次鎭南樓)라는 제목의 시가 전하고 있어 진남루의 역사를 대변해 줍니다.

爲緣淸景倚新樓   맑은 경치에 끌려 새 다락에 올랐더니        縱目初驚一葉秋  바라보니 아아 벌써 잎이 지는 가을

萬戶炊煙靑靄靄  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퍼렇게 자욱하고      四山佳氣碧浮浮  사면 산의 아름다운 기운은 새파랗게 떠오르네

分符留守二千石  병부 나눈 유수는 벼슬이 2척 석               杖鉞觀風五十州   도끼 짚고 민풍을 살핀 곳 50 고을

自幸此時當盛際  어허 대견한지고 이때가 태평 성대            鷄鳴狗吠達窮陬   닭 울음 개 짖는 소리가 벽지에도 사무치네

 

 

 

병영을 누구나 지금처럼 병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원래의 지명은 "내상리"였었는데,

1417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光山縣)에 있던 병영을 지금의 터인 당시 도강현(道康縣)으로 옮기어,

병영성(兵營城)은 당시의 병사 마천목(馬天牧)이 쌓았다고 하며,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라 하며,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1599년에 병영을 일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고,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폐허화되자 이듬해에 영을 폐지하였습니다.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이 성에서는 1656년부터 1663년까지 8년여 동안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을 비롯한 선원 33명이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기도 합니다.

 

 

 

눈이 내린 이후에 찾아서인지 "설성(雪城)" 이라는 감흥이 더욱 묻어 나는듯 합니다.

 

 

 

남문인 진남루에서 멀리 보이는 서문까지는 성벽위로 걸어가 보기로 합니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의 성벽은 둘레 1,060m이고, 높이가 약 3.5m로 남아 있으며,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 면적은 93.139m2 입니다.

동서남북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문터와,

4개의 모서리와 동벽 및 서벽에 2개씩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서쪽에 두 곳의 배수구 시설이 있으며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으며,

배후에는 해발 561m의 수인산(修仁山)에 산성이 있습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왜구가 달량진(達梁津)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元績)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81년까지에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으며,

1894년 12월 4일에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10일에는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 되었는데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1997년 사적 지정 이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2013년에 성곽은 거의 복원 되었습니다.

 

 

 

병영성은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을 관할하는 도회로서,

성안에는 객사인 청심각(淸心閣)과 그 후신인 망미루(望美樓) 문루인 공무루(共武樓)를 비롯하여 아사(衙舍)인 운주헌(運籌軒)과,

그 문루인 제승루(制勝樓)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군기고를 비롯한 각종의 공공건물이 즐비하였고,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하마비(下馬碑)를 비롯한 3개의 병사 선정비가 남아 있습니다.

 

 

 

남문에서 성벽위를 걷다보니 서문에 이르게 됩니다.

 

 

 

서문은 남문과 달리 중층이 아닌 단층의 누각으로,

 

 

 

구조는 남문과 유사하게 옹성(甕城)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서문으로 내려와 주변을 한바퀴 돌아 봅니다.

 

 

 

성내로 들어서서 북문 인근을 살펴보고,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이 설성(雪城)으로도 불리는데는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마천목 장군이 이곳에 부임하여 성을 쌓고 병사들이 거처할 집을 지으려는데 그 터를 잡지 못해 적지 않게 걱정하던 어느 날 밤에,

깊은 잠이 들어 있을 때 꿈속에 어떤 백발노인 한 분이 나타나 마천목 장군을 깨워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고,

마 장군은 그 노인을 따라 뒷산인 수인산 꼭대기에 이르러  백발노인이 화살을 내어주면서 앞 들판을 향해 활을 쏘라고 하여,

마 장군이 화살을 쏘아 날렸는데 화살이 나는 소리에 놀란 마 사령관은 깜짝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장군은 이방을 불러 이방과 함께 꿈속에서 활촉이 박히던 자리를 찾았더니 그 곳에는 선명하게 화살이 박힌 흔적이 남아 있어,

장군은 장군의 본부를 거기에다 세우기로 하였으니 그곳이  지금의 병영초등학교 자리인데,

문제는 성 둘레를 어느만큼 잡아 쌓을 것이냐 였는데 그 날 밤을 지나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지난밤의 눈이 거의 다 녹았는데도 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곳이 있어서 그 선을 따라 성 둘레를 잡았다고 하며,

마천목 절도사는 신령님의 이르심이라고 믿고 크게 하늘에 제사 지내고 성 쌓기를 시작하였기에 설성(雪城)이란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동문쪽은 이직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듯 장비들과 현장의 모습이 보이고,

 

 

 

들어왔던 남문인 진남루(鎭南樓)를 통하여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을 나옵니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설성(雪城)외에 버드나무들이 많이 늘어 선 곳에 있다하여 세류성(細柳城)이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에는 전라병마절도사로 지냈던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인물로 원균(元均),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純信)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남 강진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으로.

강진읍에서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하멜기념관, 병영성홍교를 함께 돌아볼수 있고,

병영의 이름난 한식당 "설성식당"이 있어 찾아 볼만한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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