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성의 정자 문화재 탐방에서,

호남의 3대 원림의 하나로 꼽히는 "요월정원림(邀月亭園林)"을 찾았습니다.

 

요월정원림(邀月亭園林)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있는 정원림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171 일원에,

4,500평 규모의 공간이 펼쳐져 있는 요월정원림(邀月亭園林)은,

 

 

 

자미향 가득한 조선제일의 경치로,

전남 화순의 임대정원림, 담양의 명옥헌원림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요월정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황룡정"으로,

당초 이곳은 여름철에 마을주민이 더위를 피하여 휴식하기 위하여 세운 마을의 공유·공용건물인 모정(茅亭)으로,

강의 물결을 바라본다는 관란정(觀瀾亭)이 있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한다는 영풍정(迎風亭)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요월정(邀月亭) 안쪽에는 이곳을 관리하는 곳인듯 기와집 한채가 있어,

 

 

 

"수월처사"라 일컫는 이수월 시인이 계시는 삼우정으로,

시인분의 배려로 요월정(邀月亭)의 안쪽도 들여다 볼수있게 되었습니다.

 

 

 

이수월 시인님의 관리 덕분에,

요월정(邀月亭) 주변은 깔끔하고 자연친화적으로 꾸려져 있어 그분의 문화재 사랑을 느낄수 있습니다.

 

 

 

황룡강(黃龍江)의 북서쪽 언덕위에 강쪽으로 남동향하여 세워진 요월정(邀月亭)으로,

조선 명종(재위 1545∼1567)때 공조좌랑을 지낸 사목시정 김경우(金景愚)가,

1550년대에 김경우가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와 벗하며 은거하기 위해 지었다는 정자로,

 

 

 

요월정(邀月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축물로서 서쪽에 2개의 방과 동쪽 마루로 이어지고 있어,

이와 같은 평면구조로 보아 정(亭)이라고 보다는 당(堂)에 가까운 건물로 살림집처럼 꾸며졌으며 500여년의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요월정(邀月亭)의 앞마루의 모습으로,

마루가 있는 전면에는 둥근기둥을 두었고 후면에는 사각의 기둥을 둔 모습이며..

 

 

 

요월정(邀月亭)의 현판으로,

요월(邀月)이란 "달을 부른다"는 뜻으로써 곧 벗을 부르고, 시(詩)를 청함이라 합니다.

 

 

 

또하나의 요월정(邀月亭)의 현판으로 홍두섭(洪斗燮)이 쓴 글씨이며 146cm*46cm 의 크기 입니다.

 

 

 

요월정의 주인인 김경우(金景愚)는 기묘사화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김숭조의 손자며,

중종 때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펴면서 나라를 바로잡으려던 김기의 아들이며,

지금의 건물은 1925년에 중건 되었습니다.

 

 

정자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황룡강의 전경으로,

지금은 황룡강 직선공사로 인하여 황룡강이 흐르지 않고 있지만,

옛날에는 요월정 앞 깍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황룡강이 굽이쳐 감돌아 명주실꾸리 3개가 들어갈 만큼 깊었고,

물이 맑아 고기가 맛좋기로도 유명 했다고 하며 강건너 옥녀봉(玉女峰)을 대하고 눈아래에는 흘러내리는 황룡강이 있어,

자연의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주변의 소나무 숲 사이에 100년생으로 추정되는 배롱나무 60여 그루가 자라고 있어,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이 만발하여 황홀한 경치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황룡강(黃龍江)에는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어,

옛날에 용 두 마리가 요월정 밑에 있는 연못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100일 기도를 드렸고,

기도를 드린지 마지막 날 두 마리 용은 소나무 위에 올라가 하늘의 분부를 기다렸는데,

그들이 소원이 하늘을 감화시켰던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먹구름 이 용들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때 어떤 처녀가 샘에 물 길러 와서 우연히 이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잘못하여 그만 용의 꼬리를 밟고 말았고,

꼬리를 밟힌 용은 다시 못 속으로 떨어지고, 한 마리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승천하지 못한 용은 지금도 요월정 낙화암 밑에서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전하는데,

사람들은 지금도 용이 떨어졌던 바위를 "용 바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월정(邀月亭)의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걸려있어,

곂에서 기거하시는 시인께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안내를 해 주시며 이곳의 내용을 알수있는 소책자도 선물로 주십니다.

 

 

 

정자는 뒤편에도 마루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이어지는 두칸의 온돌방이 자리해 있고,

 

 

 

방을건너 동편에 마루방이 자리해 있어,

 

 

 

마루방의 옆면과 뒤쪽은 판재로 문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고..

 

 

 

요월정(邀月亭)의 마루위에는 수많은 시판등이 편액되어 있어,

당대의 명사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고봉(高峰)기대승(奇大升,1527~1572), 송천(松川)양응정(梁應鼎,(1500년대) 등이,

이곳을 찾아와서 함께 시를 읊은 명현들의 시가 현판에 새겨있어 살펴 보면,

 

 

 

오른쪽에는 "여김추담우급창수(與金秋潭友伋唱酬)"으로 성문준(成文濬)이 김우급과 함께 창수한 칠언율시이며,

왼쪽은 "추야여조춘경유상창화(秋夜與趙春卿柳祥唱和)"로,

후손 김여석(金汝錫)이 조춘경(趙春卿), 유상(柳祥)과 함께 가을밤 요월정에서 창수한 오언율시로 김여석의 시만 편액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후손 김우급(金友伋)이 조찬한(趙纘韓)의 요월정 칠언율시에 차운한 시(詩) "추화조현주찬한운(追和趙玄洲纘韓韻)" 이며,

오른쪽 아래는  9세손 김재대(金在大)가 쓴 칠언율시로,

김재림(金在林)이 쓴 칠언율시와 운자가 같은 걸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서로 화운한 것으로 보여지며..

왼쪽 위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이 후손 김문순(金文珣)이 쓴 요월정시에 차운한 시(詩)로 "차용호김군문순운(次龍湖金君文珣韻)"이며,

왼쪽 아래 김록휴(金祿休)가 쓴 칠언율시로,

김경우의 후손인 김여석(金汝錫)과 김수항(金壽恒)이 창수한 칠언율시 "여황호처사김군여석창수(與黃湖處士金君汝錫昌酬)"를 차운한 시(詩) 입니다.

 

 

 

김인후(金麟厚)가 쓴 오언절구 3수로 "호남읍지(湖南邑誌)", "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등에는 <邀月亭三絶>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하서전집(河西全集)" 5권에도 "요월정(邀月亭)"이라는 제목으로 있습니다.

 

 

 

기대승(奇大升)이 주인 김경우(金景愚)의 원운시에 차운한 시(詩)이며,

 

 

 

요월정운(邀月亭韻)의 편액으로,

요월정(邀月亭)의 주인 김경우(金景愚)가 쓴 요월정 원운시로 칠언 율시이며 운자는 여(餘), 허(虛), 여(如), 려(廬)입니다.

 

 

 

"근화김하서요월정운(謹和金河西邀月亭韻)"로,

김인후의 "요월정삼절(邀月亭三絶)"의 첫 번째 시의 운자인 청(靑), 평(萍)에 화운한 양응정(楊應鼎)의 오언절구로,

『송천유집(松川遺集』 1권에도 실려 있는 시(詩)입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초천(苕泉) 김시찬(金時粲)이 후손 김필의(金必宜)와 함께 창수한 오언율시로,

각각 1수씩 3수가 편액되어 있는 "윤병계여김초천시찬존도와김필의공화(尹屛溪與金苕泉時粲尊道窩金必宜共和)"이며..

 

 

 

오른쪽은 "출안본도등요월정(出按本道登邀月亭)"으로,

외손인 서유린(徐有隣)이 장성을 나갈 때 요월정에 올라 쓴 오언절구이며,

왼쪽에는 "증김군원관정극광(贈金君遠觀亭克光)"으로 김창집(金昌緝)이 후손 김극광(金克光)에게 준 칠언절구 이며,

 

 

 

왼쪽의 6세손 김천언(金川彦)이 쓴 칠언절구이며,

오른쪽은 "차조현주찬한요월정운(次趙玄洲纘韓邀月亭韻)"로 임서(林瑞)가 현주 조찬한(玄洲 趙纘韓)이 쓴 요월정시에 차운한 오언절구시로,

현판에는 조찬한의 요월정 오언 절구가 없고 문집총간본 『현주집(玄洲集)』에도 보이지 않아 유실되었거나 다른 판본에 있는듯 합니다.

 

 

 

"여황호처사김군여석창수(與黃湖處士金君汝錫昌酬)"로,

 김경우의 후손인 김여석(金汝錫)과 김수항(金壽恒)이 창수한 칠언율시 2수이며,

 

 

 

김창집(金昌集), 김창흡(金昌翕), 이이명(李頤命), 이희조(李喜朝)가,

낭주(朗州; 지금의 영암)로 돌아가는 길에 장성의 요월정에 들려 후손 김후광(金後光)과 함께 만나 창수한 칠언율시로,

각각 한수씩 모두 5수가 판액되어 있어 "낭주귀로여만회김군후광창수(朗州歸路與晩悔金君後光昌酬)"이며..

 

 

 

"여김군윤철등요월정(與金君允喆登邀月亭)"으로,

이보온(李普溫)이 후손 김윤철(金允喆)과 함께 요월정에 올라 쓴 칠언 율시 이며,

 

 

 

"근차요월정운(謹次邀月亭韻)"으로,

최경휴(崔敬休), 최일휴(崔日休)가 쓴 칠언절구 각각 1수씩 2수가 함께 판각된 편액으로,

9세손 김경찬(金京燦)과 김병학(金炳學)이 쓴 두 시(詩)와 운자가 같습니다.

 

 

 

5세손 김회찬(金會燦)이 요월정(邀月亭)의 주인이자,

선조인 김경우(金景愚)의 원운시에 차운한 칠언율시인 "김경우의 차운시" 이며,

 

 

 

6세손 김천록(金天祿)이 쓴 칠언율시가 올려져 있고,

 

 

 

6세손 김천근(金天根)이 쓴 칠언율시 입니다.

 

 

 

8세손 김조(金照)가 쓴 칠언 율시이며,

 

 

 

"여김군덕연도등요월정(與金君德淵燾登邀月亭)"으로,

서유승(徐有升)이 후손 김덕연(金德淵)과 함께 요월정에 올라 쓴 칠언율시 이며..

 

 

 

후손 김극광(金克光)이 쓴 칠언율시로,

"낭주귀로여만회김군후광창수(朗州歸路與晩悔金君後光昌酬)"가 판각된 판액의 시들과 운자가 류(流), 루(樓), 주(洲), 수(酬)로 동일 합니다.

 

 

 

6세손 김천계(金天繼)가 쓴 칠언절구 이며..

 

 

 

후손 김우삼(金友參)이 쓴 칠언 절구의 시(詩) 입니다.

 

 

 

"여김군천계창화(與金君天繼唱和)"로,

김시찬(金時粲)이 후손 김천계(金天繼)와 창수한 칠언율시. 운자가 심(心), 임(臨), 음(音), 금(今) 입니다.

 

 

 

중건 이후 1968년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김윤동(金潤東)의 기문 "요월정기(邀月亭記)"로,

요월정(邀月亭)의 위치와 주변경관의 모습 및 건립자인 김경우(金景愚)의 행적 및,

김인후, 기대승 등 당시 교유했던 인물에 대한 소개와 한때 퇴락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어,

그 후손인 김채수(金采洙)와 김기업(金琪業)의 부탁에 의해 기문을 쓰게 된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나와 온돌방을 통하여 되돌아 나옵니다.

 

 

 

요월정(邀月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이곳은 강이 있어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의 송림 사이에 중국의 원산종인 배롱나무가 군식하고 있어 여름철이면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데,

500~600년이 지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이 숲은 그야말로 "원림(園林)"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곳입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년~1560년)가 요월정(邀月亭)에 남긴 시(詩)입니다.

月色當軒白(월색당헌백)  달빛은 정자에 밝은데   秋光入眼靑(추광입안청)   가을빛이 눈에 푸르네

登臨此夜景(등림차야경)  이 밤 경치 바라보니    一世笑浮萍(일세소부평)   한 세상 부평초 같구나.

 

 

 

요월정을 건립하였던 김경우(金景愚)의 9세손인 김경찬(金京燦,1796∼1819)은 요월정을 다시 중건하면서,

 경치가 빼어남을 찬양하여 다음과 같이 요월정 중수운(邀月亭 重修韻)을 지었습니다.

百日花紅度幾秋 重光重喜且重修     백일홍꽃 붉어서 몇 가을을 지냈는고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서 집을 고치는도다

朝鮮第一黃龍里 夜月更三白鷺洲     조선제일 황룡리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백로 노는 물갓이라

好個東山還舊主 超然南國有名樓     좋은 동산에 옛주인이 돌아오니 남쪽의 유명한 누각이 더욱 뛰어나구나

鳳凰己去臺空在 安得詩仙與共遊     봉황은 이미 떠나고 집은 비어 있으니 어느 때나 시선을 만나 함께 놀아 볼까.


위 글 중 "朝鮮第一黃龍里(조선제일 황룡리)란 대목이 문제가 되어,

왕도(한양)를 능멸했다는 모함을 받아 임금님께 불려가게 되어 "朝鮮第一黃龍里"라 한 것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예"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한양은 어떤고?"하고 다시 묻자 "天下第一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그렇다면 중국의 장안은 어떤가?"라고 하니 "萬古의 第一입니다"라고 답하여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는 유명 합니다.

 

 

 

정자는 남동향으로 자리해 있고 아래로는 황룡이 하늘을 향해 올랐다는 전설이 있는 소(沼)와 절벽이 조화를 이루고,

그 주변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배룽나무가 앞뒤로 어우러져 전형적인 우리의 원림을 보여주는 곳으로,

이곳의 백미는 흐드러지는 배롱나무꽃과  달 , 소나무가 어우러져 달을 부른다는 달밤 일 것입니다.

여건이 되면 배롱나무꽃이 만발한 여름 보름달이 있는 밤에 다시찾고 싶은곳으로 전남 장성의 "요월정원림(邀月亭園林)"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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