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의 문화재 탐방에서,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팔괘정(八卦亭)을 찾았습니다.

 

충청남도에서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 되어있는 팔괘정(八卦亭)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그 학맥에 연계되는 인물들의 행적이 스며 있는 유적으로,

 

 

 

팔괘정(八卦亭)은 강경유림(江景儒林)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서,

 

 

 

왼쪽의 낮은 언덕으로 조금만 오르면 만날수 있어,

 

 

 

팔괘정(八卦亭)으로 1663년(현종 4) 송시열이 스승인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1626년(인조 4)에 이곳으로 내려와 황산서원(黃山書院, 지금의 竹林書院)과 임리정(臨履亭)을 세워 선현(先賢)을 추존하며 후진을 교육하니,

스승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마음에 150m 떨어진 이곳에 팔괘정(八卦亭)을 건립하였다고 하며,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지는 팔괘정은,

죽림서원의 북쪽 언덕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어 임리정(臨履亭)과 함께 죽림서원(竹林書院))의 양 날개처럼 사우를 위요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정자 안쪽에는 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바위에는 가로로 각자 되어 있으며 자경(字經)이 21㎝ 크기로,

송시열이 각자했다고 전하는 "청초암(靑草岸)"으로 "금강가의 푸른 강가"를 뜻한다고 하며,

 

 

 

그 옆에는 자경(字經)이 44㎝의 크기로 세로로 새겨놓은,

"꿈에서나마 가고 싶은곳"에 대한 꿈을 담은 몽괘벽(夢挂壁)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몽괘벽(夢挂壁)은 송시열이 팔괘정을 짓고 생활하고 있을 때 팔괘정에 글이 걸린 꿈을 꾼 뒤 새겼다고 전하며,

각자를 한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보 제239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초상화(국립박물관 소장)로,

팔괘정(八卦亭)의 주인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던 노론의 영수로 정치 사상계의 거장으로 유림 위에 군림한 인물로,

숙종 15년(1689)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놀란 끝에 노론(老論)이 밀려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는 사건인 기사환국)이 일어나,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3세의 노구(老軀)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숙종 20년(1694)에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 되어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는데,

사액서원만도 서른일곱 군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2칸의 마루로 꾸려진 팔괘정(八卦亭)은 마루방의 전면은,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문을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되어 있으며..

 

 

 

한칸의 온돌방도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둔 모습이 보이는데,

송시열은 이 정자를 지으면서 창살무늬를 팔괘(八卦)로 꾸몄고,

그로 인하여 정자 이름을 팔괘정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모습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지척에 있는 임리정(臨履亭)과 마찬가지로,

이곳 팔괘정(八卦亭)은 문이 굳게 닫아놓아 마루방에 있음직한 편액들은 살펴볼수 없는데,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뒤에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어놓은 인물로,

이로 인하여 강경유림(江景儒林)에서는 임리정과 함께 이 팔괘정을 유림의 소유로 삼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고 하는데,

작게나마 폐쇠적인 강경유림(江景儒林)의 문화재 관리실태를 느낄수 있습니다.

 

 

 

팔괘정(八卦亭)은 1695년(숙종 21) 송시열이 죽림서원에 배향되자 죽림서원의 부속 건물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관청의 소유가 되고, 대지는 일본인에게 넘어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극도로 퇴락 하였다가,

해방 후 1948년 죽림서원 유림들의 발의로 대지를 돌려받았고,

1949년 송시열의 본손인 송재성(宋在晟)이 유림의 협조로 말끔히 중수하고 기문을 지어 걸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사상가, 철학자인 이중환(李重煥,1690~ 1756년)이 말년에 팔괘정(八卦亭)에 머물며,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와 교화의 연혁을 차례를 엮어 기록한 "택리지(擇里志)"를 쓴곳 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건물은 금강을 전면에 두고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방바닥은 누마루형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의 2칸에는 통간으로 대청마루를 만들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올렸고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5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처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한식 기와집 입니다.

 

 

 

팔괘정(八卦亭)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으로,

옛날에는 금강따라 들어오는 배들을 관망하고 강건너 황산벌, 부여에서 내려오는 금강을 관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에 있어..

금강(錦江)의 수려한 경관을 즐겼다고 전하나 세월의 흐름과 개발의 영향으로 옛정취를 찾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에 대해서는 저마다 호불호의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노론(老論)의 영수였으며 유림 위에 군림한 인물로,

한때는 당대를 호령했던 기호학파의 위상을 살펴볼수 있으며..

사제간의 깊은 정을 찾을수 있는곳으로 죽림서원(竹林書院), 임리정(臨履亭)과 함께 돌아볼만한 곳으로,

금강의 정자  논산 "팔괘정(八卦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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