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으로,

정조의 숨결과 효심(孝心)을 살펴볼수 있는 정자인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찾았습니다.

 

서울 동작구의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서달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북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조선 정조(正祖) 때, 왕이 수원에 있는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잠시 머물렀던 행궁으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에 툇간을 두었고,

사방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오량구조의 겹처마집으로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입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고 하며,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점심을 들곤 했습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현판으로,

정자의 이름은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대고 봉이 나는 것처럼 보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이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자로 들어가는 디딤돌로,

긴 쪽마루를 앞에두고 문의 크기와 모양으로 마루방과 온돌방의 구분이 됩니다.

 

 

 

마루로 오를때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마루 한켠에 실내용 슬리퍼를 비치해두어 이곳의 관리가 잘되고 있슴을 보여주는듯 합니다.

 

 

 

정조(正祖)의 화성원행(華城園幸)에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 지며,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만 남아 있습니다.

 

 

 

앞에 길게 쪽마루를 두고 양쪽에 한단을 높여 누마루를 둔 모습이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795년 2월 9일 정조는 창덕궁을 떠나 돈화문에서 어머니 혜경궁을 맞아 말을 타고 출발했으며,

그 뒤를 채제공을 비롯한 1700여 명이 따랐으며 노량진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인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은 뒤,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그리고 다음날 서둘러 화성으로 향했습니다.

2월 12일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에 올라 참배하고 2월 15일 귀환길에 오릅니다.

2월 16일 시흥을 떠난 정조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에서 점심을 먹고 배다리를 건너 환궁하였습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내부에는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幸班次圖)가 길게 걸려있어,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의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幸班次圖)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주도하여 그린 그림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생모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행차한 일과,

그것에 수반된 여러 왕실 행사를 기록한 책이며,

정조(正祖) 19년(1795) 2월, 정조(正祖)는 수원(水原) 화성(華城)의 준공(竣工)을 앞두고 왕실(王室)의 큰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해는 정조(正祖)의 어머니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回甲)이자 돌아가신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회갑(回甲)이기도 했으며,

정조(正祖) 자신이 즉위(卽位)한 지 20년이 되는 뜻깊은 해 였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화성행차(華城行次)와 회갑연(回甲宴)이 마련되면서,

행사 전반을 기록하는 의궤청(儀軌廳)이 세워졌으며 모든 그림의 총책임을 김홍도(金弘道)가 맡아,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幸班次圖)」, 「주교도(舟橋圖)」,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등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알고있는 정조(正祖)는 조선 제 22대 왕이자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로,

이름은 산, 자는 형운, 호는 홍재이며,

규장각을 두어 정치 엘리트를 양성하고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들었으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임금으로 새 서울을 꿈꾸며 화성을 쌓았으며,

개혁정치를 실천한 성군 정치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49세에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겸재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동작진(銅雀津)으로,

영조 20년(1744)경 작품으로 비단에 엷게 채색한 32.6×21.8㎝ 크기로,

지금의 동작대교가 놓여 있는 동작나루 일대를 서울 쪽에서 바라본 그림으로,

관악산 우면산이 먼 산으로 처리되고, 현재 국립현충원이 들어서 있는 동작마을 일대가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하삼도(下三道·서울 아래쪽의 충청 전라 경상 3도)로 내려가는 가장 큰 나루답게 마을 아래 강가에는  20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고,

승방천(僧房川)이라 부르던 반포천(盤浦川)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수교(梨水橋) 일대와,

반대편 흑석동 쪽 강변마을은 버드나무 숲이 가득 우거져 있으며,

당시의 동작마을은 서울 세가(世家·대 물려 특권을 누리며 사는 집안)들의 별장으로 가득차 있었던 듯 번듯한 기와집들이 즐비 합니다.

 

 

 

화성능행도의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 제8폭에서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화성능행도병'의 마지막 폭의 일부로 윤 2월 16일 노량진(鷺梁津)의 주교(舟橋)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의 행렬장면을,

강건너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입니다.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에서는 36척의 교배선(橋排船)과 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많은 상풍기(相風旗)와 군기(軍旗)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전개되어,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으며  주교는 기왕의 부교(浮橋)에 위험성과 번거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1789년 정조가 새로이 고안 설치하며 시작된 것입니다.

 

 

 

1795년은 정조(正祖)의 친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태어난 지 만 60년이 되며,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51세가 되어 망육(望六)에 이른 동시에 국왕 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특별히 경사스러운 해라 하여,

많은 기념행사를 하였는데 정순왕후에게 수경(綏敬), 혜경궁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올린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 중심은 전례 없이 대대적인 규모로 수원에 행차하여 혜경궁을 위한 잔치를 열고 각종 행사를 거행한 것이으로,

이것은 하나의 왕실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당시까지 정조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중요한 정책을 일단락 짓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정조(正祖)를 근원적으로 제약하고 있던 어려운 문제는,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선왕(先王)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조와 사도세자의 정당성 사이에 선 정조의 정책은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친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권위를 점점 높여가는 방향으로 추진되어,

이러한 정조의 노력이 화성행궁에서 성대하게 벌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마루방에서 사분합문(四分閤門)의 채광을 느껴보고,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지금은 주택가와 고층 건물들로 인하여 저멀리 남산과 한강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개발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양주까지도 보였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고 합니다.

 

 

 

시대의 흐름과 현대화의 개발로 교각과 혼잡한 도로에 가로막혀,

옛 그림에서 보았던 한강의 모습은 볼수가 없습니다.

 

 

 

마루방 전면에 보이는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여름에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을 접어서 들어 올려두면 더욱 운치가 있을듯 합니다.

 

 

 

마당 한켠에는 무덤의 망두석의 모습도 보여,

인근에서 가져다 둔것으로 여겨지며..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는데, 

주정소(晝停所) 라고도 불렸던 이곳에는 당시 노들강(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주교사와 주교대장도 있었으며,

이 건물은 견실하고 단아한 정조 대의 행궁 건축으로 주위에는 일부 건물의 기단부와 주초석이 아직도 남아있어,

당초에는 정문과 두어채의 다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간통 단층인 이 용양봉저정은 온돌구조로 견실하게 지어 졌습니다.

 

 

 

양쪽 옆면에 방에 딸린 그리높지 않게 내어둔 누마루는 아담한 편이나 격식이 있어,

 

 

 

일반적으로 보아온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아닌 육분합문(六分閤門)으로,

6개의 문을 접어서 들어올리는 문으로 한면의 벽전체가 모두 열리는 구조여서 특이 합니다.

 

 

 

이 건물은 고종 때 내무대신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되어 1908년 11월 구한말 4년제 사립 보통학교로 설립하였다가,

그 후 1930년 일본인 지전(池田)의 손에 들어가면서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평에 온천, 욕장, 운동장, 식당 등을 두어 오락장으로 삼고 그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쳤으나,

광복과 함께 이 곳을 국유로 환원하여 오락 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정자의 뒷면도 모두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되어있어,

 

 

 

전면과 후면, 옆면까지 분합문(分閤門)으로 되어 있어,

문을 모두 접어서 들어올린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의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정자의 뒤편에는 다듬어 사용한 초석들이 있어,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있었슴을 추측케 합니다.

 

 

 

정조(正祖) 임금의 의지와 효심(孝心)을 살펴 볼수있는곳중 하나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자리해 있는 한강변의 정자 문화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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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본동 10-30 | 용양봉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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