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정자 "경렴정(景濂亭)"을 찾았습니다.

 

경렴정(景濂亭)은 소수서원 입구에서 찾을수 있는데 외삼문 앞 오른쪽에 자리해 있어,

보통 서원의 정자들이 서원의 안쪽에 자리를 잡은 것과 대조적으로,

경렴정은 서원 경내 바깥에 있는데 일정한 배치 규칙이 없던 초기서원 배치 방식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예이며,

 

 

 

정문 밖 동쪽 절벽 위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은 주세붕(周世鵬)이 서원 건립할 당시인 1543년에 세웠으며,

원생이나 유생이 자연을 벗 삼아 시회나 회합을 열어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 했습니다.

 

 

 

경렴정(景濂亭)의 주인 주세붕(周世鵬,1495(연산군 1)∼1554(명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손옹(巽翁)이며,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 하였으며,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고 공조좌랑, 병조좌랑,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습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으며.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되었다가,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으며,

승문원교리,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습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고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 하였으며,

이후 대사성,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 되었습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 되었으며,

저서로는 〈죽계지 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 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 心圖彛訓〉·〈심경심학도 心經心學圖〉 등이 있고,

문집으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 등 장가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가 전하고 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과 소수서원에 배향 되었고,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 입니다.

 

 

 

경렴정(景濂亭)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정면의 해서체(楷書體) 편액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글씨이고,

 

 

 

마루 안쪽에 걸려있는 초서체(草書體)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글씨이며,

경렴정의 "경렴(景濂)"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경모한다는 뜻으로,

주돈이는 장시성의 루산 개울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개울이 염계이며 개울가에 염계서당을 짓고 자신를 염계선생 이라 하였는데,

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팔작지붕의 경렴정(景濂亭)은,

따로 방을 들이지 않고 누마루만 둔 형태로 소박한 난간을 두른 정자로,

 

 

 

정자의 마루로 올라보려 하였으나,

이곳 소수서원(紹修書院) 일원은 많은 이들이 찾는곳여서 인지 마루에 오르는것을 막고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수많은 시판들과 편액들이 올려져 있으나,

오를수 없으니 마루의 난간을 따라 돌면서 살펴 볼수밖에 없습니다.

 

 

 

마루 밖에서 편액을 담다보니 사진이 바르지 못하기도 한데,

마루 위에는 주세붕(周世鵬)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설강(雪江) 안현(安玹) 등 당대 묵객의 시판이 걸려 있습니다.

 

 

 

정자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의 모습이 들어오고,

 

 

 

서원앞에 자리하고 있어,

서원으로 들어오는 길의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적송의 군락도 들어 오는데,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 졌다고 합니다.

 

 

 

서원을 지키듯 문앞에 정자가 자리해 있어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이 한눈에 들어 오는데,

1542년(중종 37)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사묘를 세우고,

다음해에 학사를 옮겨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소수서원의 시초 입니다.

 

 

 


경렴정(景濂亭) 곁에 있는 500년 묵은 은행나무사이로 죽계가 내려다 보이며,

신재 주세붕(周世鵬)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있는 경렴정(景濂亭)을 읊은 시(詩)를 살펴 봅니다.

八月溪堂夜氣寒   팔월의 계당 밤 기운 차가운데

中庭俯仰二儀寬   뜰에서 천지조화를 살펴보네

若無太極乾坤息   만일 태극과 음양이 없어 쉰다면

誰似堯夫解弄丸   누가 소옹(邵雍, 邵康節)의 재주를 알아 주리요

磨崖題刻白雲名   벼랑을 깎아 백운동이라 하여 세기니

白日白雲生白石   밝은 날 흰 구름 백석에 피어나네

太守頻來愛白雲   내가 백운을 사랑하여 자주 찾으니

白頭如雪眼藍碧   눈처럼 하얀 머리에 눈은 푸르다네

주세붕(周世鵬)이 소수서원에 있는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에 대해 지은 시(詩)로,

경관을 읊은 것 뿐 아니라 도학적(道學的)인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경렴정(景濂亭) 동쪽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어,

경자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경(敬)”자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며,

경자바위에는 인근의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과 관련한 애틋하고 슬픈 사연이 함께 전하고 있어,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참절당한 제 의사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로는.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므로 유생들이 밤 출입을 꺼리자,

주세봉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의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니 그때부터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는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로,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주세붕(周世鵬)의 "경"자 위에 '백운동(白雲洞)"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정자 아래 죽계천(竹溪川) 건너에 이황(李滉)의 취한대(翠寒臺)가 있어,

취한대(翠寒臺)는 이황(李滉)이 세우고 손수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서 꾸민 곳으로,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1986년에 지은 정자로,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으면서,

서원앞에 자리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한 정자, "경렴정(景濂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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