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송의 문화재 탐방에서,

풍호(風乎) 신지(申祉)의 정자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를 찾았습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292호로 지정된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로,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에 위치해 있는데,

안동시 임하의 백운정(白雲亭)과 함께 마음먹고 찾았던 만큼 탐방의 기쁨이 배가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로 들어가는 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34번 국도에서 내려 반변천을 건너 천변을 따라 비포장길을 한참 가야 하는데,

네비게이션이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해 잠시 다른곳을 들르기도 했지만,

경북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24번지를 찾으면,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 일원의 뒷편으로 나오게 되며,

잠시후 감탄사를 발하게 됩니다.

 

 

 

비포장 길을 들어서인지 이곳은 아늑하며 아주 조용한 곳으로,

임하댐을 향하는 반변천의 모습이 보이고,

 

 

 

진보면에서 풍호정(風乎亭)을 향해 내려오는 반변천이  산세와 더불어 여유롭습니다.

 

 

 

풍호정(風乎亭) 뒤편에는 수령 200년을 넘긴 늠름한 소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으며,

 

 

 

한쪽에는 맞배지붕의 한칸의 비각(碑閣)이 있어,

풍호정의 주인 신지의 후손인 신례남(申禮南) 부부가 임진왜란 당시 세운 공을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으로,

 

 

 

청송군 향토문화유적인 쌍절비각(雙節碑閣)의 비(碑)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참판공 신예남(申禮男)이 충북 괴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함에 부인 민씨가 소식을 듣고 남편의 시체나마 찾으려 적지로 갔으나,

왜적들이 손목을 만지고 젖가슴을 만졌다 하여 돌아와 손목을 자르고 젖가슴을 오려내어 순절하므로,

선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공에게는 가선대부공조참판의 직과 부인에게는 정부인을 증하고 정려각을 짓기를 명하여,

현재 청주 오창 복현리에 유허비각이 있으며, 이곳 합강리에는 서강사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비신(碑身)의 윗부분에 있는 이수(螭首)에 해당되는 부분의 문양이 눈에 들어 옵니다.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의 주사(廚舍)의 모습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莊節公 申崇謙)의 18대손인 신지(申祉)가 조선 태종 14년에(1414)에 건립 하였는데,

숙종 9년(1683)에 고쳐 지었고 1947에도 고쳐 세운 바 있어 원래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 입니다.

 

 

 

풍호정(風乎亭)의 주사(廚舍)부터 살펴 봅니다.

 

 

 

민가인 주사(廚舍)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에,

"ㅁ"자형 구조의 건물로 경상북도 북부지방 민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 이기도 합니다.

 

 

 

"ㅁ"자형 구조의 건물여서 비가오는 경우에,

크지않은 마당에 빗물이 모여들기 때문에 마당 한가운데 작은 연못마냥 낮게 해두고 배수를 설치해두어,

경기도 일산의 "밤가시 초가"를 연상하게 합니다.

 

 

 

주사(廚舍)는 약한 경사지에 전면의 반변천을 바라보면서,

정면(正面) 4간(間)에 측면(側面) 4간(間)의 방형의 "ㅁ"자형 건물로 되어있으며, 

배면쪽으로 2간(間)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토상의 고방을 배치시켰으며,

 

 

 

마루의 구성수법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기둥과 기둥사이에 장귀틀이 연결되는 것이 일반적인 법식인데 여기서는 구성방법을 달리 하였습니다.

장귀틀이 기둥과 연결되지 않고 여모중방과 연결되면서 하부에 장귀틀을 받는 부재하나가 더 지나가게 되는데,

 

 

 

좌측의 온돌방은 부엌과 연결되면서 1간(間)반정도로 규모를 확대 시켰으며,

마루와 통하는 외짝세살문은 그 높이가 4자 정도로 낮으며 측면(側面)쪽으로도 외짝세살문을 두어 외부에서 직접 출입하기 편하게 하였습니다.

 

 

 

고방과 연하여 풍호정과 연결되는 대문간(大門間)을 설치하고 있어,

대문간과 연결되는 온돌방이 2간통(間通)으로 이루어 지며 온돌방과 연하여 마루한간이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구성이 독특 합니다.

 

 

 

정면(正面) 하부에 궁판을 끼운 정자살문을 세워 폐쇄시키고 있으나,

내정쪽으로는 개방되어 좁은 내정의 답답함을 시원스레 처리하면서 정면(正面)에서 보이는 건물의 형상은 구색을 갖추게 배려함을 살필 수 있으며,

마루와 연하여 대문간이 설치되고 좌측에 외양간이 부엌과 연결되는 구조 입니다.

 

 

 

대문간과 연결되는 온돌방을 들여다 보고 풍호정(風乎停)으로 나옵니다.

 

 

 

주사(廚舍)의 위치는 앞쪽에 흐르는 반변천을 바라보며 풍호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고 왼쪽으로는 "ㅁ"자형 민가인 주사가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어,

쌍절비각(雙節碑閣)에서 풍호정을 지나 안쪽에 자리해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풍호정(風乎停)은 합강동 평산 신씨 시조인 풍호(風乎) 신지(申祉)(1424∼?)가 세운 정자로,

신지는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18대손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 났으며,

관직은 의영고 부상(義盈庫 副使)에 올랐고 청백리로 여러 선비들과 이 정자에서 강론 하였다고 하며,

진보면(眞寶面) 소재지에서 안동-영덕선 국도 서쪽으로 약4Km에 이르면 합강동(合江洞) 언덕위,

고목이 어우러진 숲속에  화강암 층 위에 세워진 아담한 정자,  풍호정(風乎亭)입니다.

 

 

 

풍호정(風乎停)의 현판으로,

"풍호(風乎)"라는 말은 논어(論語)에서 유래 한다고 하며 "바람쏘이며 여유롭게 노닌다."라는 의미 라고 합니다.

 

 

 

정자의 주인 풍호(風乎) 신지(申祉)(1424∼?)는,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합강동(合江洞)에 이사하여 입향시조(入鄕始祖)가 되었으며,

신지의 자는 독경(篤敬), 호는 풍호(風乎)이며 1463년(세조 9)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풍채(風采)가 늠늠하고 재기가 비범 하였고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文集)과 시서(詩書)를 익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친척 및 인근 어른들로부터 칭송이 자자 했습니다.

외조부를 따라 청송의 진보(眞寶)에 왔다가 부친과 모친이 하루 사이에 돌아 가셨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상을 맞음에 성의를 다하여 예에 맞게 상을 치르고 3년 동안 피눈물로 시묘 살이를 하였으며,

80세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당(祠堂)에 배읍(拜泣)하였는데 언제나 친히 술잔을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고,

제전(祭田)을 많이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세조(世祖) 때 진사시(進士試)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갈 뜻을 접고 초아에 묻혀 평소의 소신대로 살았으며,

1463년(세조 9) 효행(孝行)과 청렴(淸廉)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가지 않았으며,

만년(晩年)에 진보로 돌아와 합강(合江) 상류(上流)에 풍호정(風乎亭)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늙도록 서로 같이 즐겼으며,

여러 선비와 시와 술을 함께 나누며 유유자적하게 살았습니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인 풍호정(風乎停)으로,

마루방의 사분합문(四分閤門)을 통해 마루방으로 들어가 봅니다.

 

 

 

가운데 위치한 마루방은 양쪽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배면은 골판벽에 쌍여닫이 골판문을 달아 폐쇄형으로 꾸렸으며,

 

 

 

마루 위에는 언지재(言志齋)의 현판이 보이고,

 

 

 

2개의 기문(記文)이 있어 정자기문에 의하면,

숙종 9년(계해, 1683)에 중수하였으며 1947에도 중수한 바 있다고 하며,

본 건물은 1947년 중수시 거의 원형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중수전의 사진과 비교해 볼 때 중수전에는 어간(御間)과 좌협간(左夾間)에 온돌방이 자리하고,

우협간(右夾間)이 마루로 구성된 평면형을 지니고 있었으며 계자난간이 아닌 헌함형식으로 전면이 구성 되었으며,

지붕의 와곡이 뚜렷하여 고태가 있었으나 중수 후 당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온돌방을 들여다 보고,

 

 

 

양쪽의 온돌방은 같아 보이면서도 조금 다른점이 오른쪽의 방은 후면에 작은 벽장을 꾸린듯 합니다.

 

 

 

정자는 한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서 인지,

마루 안에서 보이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은 문살만 남아 있습니다.

 

 

 

풍호정(風乎停)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진보면을 지나며 임하댐을 향해 내려오는 반변천의 모습이 들어오고,

 

 

 

발 아래로 반변천의 맑은물이 흐르고 주변 풍광 또한 아름다워,

정자의 자리로는 으뜸가는곳 중 하나라고 할수 있습니다.

 

 

 

동쪽에는 비봉산(飛鳳山)이 솟아있고 서쪽에는 높은 산이 펼쳐져 있고,

호명천(虎鳴川) 건너편에는 작약산(芍藥山)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며,

상류에서 바위층을 감돌며 굽이쳐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소(沼)를 이루고 또한 늪을 이루어,

그 신비로운 자연의 풍치가 한 폭의 빼어난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정자는 창호의 종이가 없이 문살만 있는것도 아쉽지만,

앞 마루의 일부는 떨어지고 있어 관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풍호정(風乎停)에서 내려와 곁에 있는 주사(廚舍)가 함께되어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의 일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수가 수려한 청송에는 빼어난 정자 문화재가 여럿 있지만,

청송을 대표할만한 정자중 하나로 손꼽을 만한 곳으로 600년을 넘기는 역사속에서 중수를 통하여 옛 모습은 많이 사라져 아쉬움이 있지만,

오지에 자리하여 고적함과 빼어난 풍경으로 청송 진보의 아름다운 정자 문화재 "풍호정주사(風乎停廚舍)"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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