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문화재 탐방에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안장된 능인 정릉(貞陵)을 찾았습니다.

 

사적 20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릉(貞陵)의 입구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제11대왕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이 있어,

한글 발음은 같고 한자의 표기만 달라 착오가 있을수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으로,

오래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기전에는 능침에 오를수 있었는데,

등재된 이후에는 극히 일부의 능을 제외하고 아래에서 바라보기만 되어있어 능침을 제대로 볼수없어,

왕릉은 산책삼아 가는정도로 찾게되어 멀어 졌었는데 마침 문화재를 공부하는 답사팀에서 능침에 오른다니 서둘러 함께 하였습니다.

 

 

 

정릉(貞陵)의 입구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낮게 오르는 길이 있고 재실(齋室)이 있어 들어가 봅니다.

 

 

 

재실(齋室)은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정릉의 재실(齋室)은 1409년 현재 자리로 이장되었고 그 규모도 대폭 축소 되었는데,

이후 정릉은 폐허처럼 방치되었다가 1669년(현종 10)에 정비되었고,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초석만 남기고 1960년대 멸실 되었던 것을,

 

 

 

1788년에 발간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나오는 기록에 의거해서,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하고 발굴조사 결과와 사료를 근거로,

2012년부터 3년간 재실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3개소)과 담장등을 관계전문가 자문,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복원을 완료하였습니다.

 

 

 

대문채에 있는 행랑으로,

대문과 하인방, 마구간, 집사방, 창고등이 있는 부속 건물이며,

 

 

 

재실(齋室)앞에는 2칸의 작은 건물이 있어,

제기(祭器)를 보관하 였던 "제기고(祭器庫)" 이며..

 

 

 

왕릉 재실(王陵 齋室)은 왕릉제향 및 왕릉관리를 위한 공간으로,

재실의 주요 건축물로는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과 향축을 보관하면서 헌관이 묵는 안향청과,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 참봉 등이 거주하면서 업무를 보는 대청, 기타 확가, 화계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능을 관리하는 벼슬인 능참봉은 기본적으로 2인이 임명 되었고 재직 근무일수는 450일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재실(齋室)을 나와 능으로 가는 길목에서 작은 돌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는데,

 

 

 

궁궐의 배치와 같이 바깥세상과 분리해 주는 하천인 금천이 흐르며 작은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의 의미가 있어 능을 조성할때 땅을 파서 인위적으로 금천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금천교(禁川橋)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꺽으면 홍살문이 보이고,

 

 

 

홍살문 앞에 서면 정릉(貞陵)은 입구부터 다소 다른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參道)가 직선이 아니라 "ㄱ"자로 꺾여 있슴을 볼수 있습니다.

 

 

 

 홍살문에서 참도(參道)로 들어서기전 오른쪽에 반듯한 자리가 있어,

정자각으로 들기전 제주(祭主)가 제사를 고하는곳으로 보이고..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길인 참도(參道)는 높이가 다른 2개의 길로,

왼쪽의 높은 길은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향로(香路)이며,

오른쪽의 조금 낮은 길은 어로(御路)이며 제향을 드리러 온 임금님이 걷는길로 왕릉 방문시 어로로 걸어가야 합니다.

 

 

 

제례때 제사를 올리는 "丁"자 형태로 지은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으로,

왕릉에서 주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보기힘든 구조의 건물로,

왕릉에서 제를 지낼 때에는 일반인이 묘에서 제를 지내는것과 달리 능아래 정자각에서 제를 올립니다.

 

 

 

앞에서 보아 정자각 왼쪽에는 수라간이 있어,

 

 

 

수라간(水剌間)은 왕릉에 제향을 지낼때 쓸 제사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등 준비 하는곳 입니다.

 

 

 

수라간과 마주하여 비각과 작은 건물이 있어,

 

 

 

건물은 수복방(守僕房)으로 참도(參道)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서있어야 하며,

능역을 관리하기위하여 일반적으로 정자각의 동편에 있으며..

 

 

 

수복방(守僕房)은,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또는 청소 등의 허드렛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인 수복(守僕)이 거처하던 곳으로,

 

 

 

2칸 규모의 수복방은 제기(祭器)를 보관하기도 하였는데,

온돌방 한칸외 나머지 한칸은 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의 모습도 보입니다.

 

 

 

수복방 곁에는,

신덕왕후의 일대기가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인 비각(碑閣)이 있어,

 

 

 

대한신덕고황후정릉비(大韓神德高皇后貞陵碑)로,

이 글씨는 고종의 어필로 광무(光武)4년인 1900년에 세웠다고 하며,

1669년경 현종재위시 송시열의 주청으로 신덕왕후 강씨가 종묘에 태조의 계비로 추봉 되면서 세운 비석에 다시 썼다고 합니다.

 

 

 

비각을 둘러보고 정자각(丁字閣)으로 나옵니다.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인 신계(神階)와 동계(東階)로,

왼쪽은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이라 하여 신계(神階)라 하고,

오른쪽은 왕과 제관이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동계(東階)라 하며 신하들은 왼쪽에 나무계단을 임시로 두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왕비의 신좌(神座)를 모시고.

각종 제사를 지내는 정자(丁字) 형태의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으로 들어 옵니다.

 

 

 

정자각 안에는 제상(祭床)이 있어 앞에는 축문을 올려 놓는 축상(祝床)과 향로를 올려 놓는 향상(香床)이 있고,

왼쪽에는 제향시 태울 축문을 올려 놓는 망료상(望燎床)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제향(祭享) 때 술을 담는 그릇인 준뢰(樽罍)를 올려놓는 상인 준상(尊床)이 있고,

그 앞엔 제관이 손을 씻을 물을 올려 놓는 관세상(盥洗床)이 있으며, 

제상(祭床)의 색이 노란색은 고종때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여,

개국군주인 태조를 고황제(古皇帝)로 추존되있으므로,

태조의 계비인 신덕고황후(神德皇后) 또한 고황후(高皇后)가 되니 황제의 상징인 노란색의 제상(祭床)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엎드리면 능침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정릉(貞陵)의 능침은 높은곳에 위치해서 인지 보이질 않습니다.

 

 

 

정자각의 왼쪽에는 계단인 서계(西階)가 있어,

서계는 축관(祝官)이 축문(祝文)을 소전대(燒錢臺)에서 태우기 위해 오르내리는 계단 입니다.

 

 

 

서계(西階)를 내려서면서 정자각 곁에는 작은 석물이 있어,

 

 

 

제례를 마친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서 세운 석물인 소전대(燒錢臺)로,

소전대(燒錢臺)는 2009년에 약수터 근처에 방치돼 있었던 것을 찾아 원래의 자리에 600여년 만에 상설 했는데,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1788년 정조 때 국조 오례의 연혁과 실행 사례를 자세히 기록한 책)에 그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은 소전대(燒錢臺)는 조선시대 초기의 능인 이곳 정릉 외에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과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獻陵)에만 있다고 합니다.

 

 

 

정자각의 뒤편으로 가보면,

능의 주인이 제례음식을 취하러 건너는 돌다리인 신교(神橋)가 보이고,

 

 

 

제상(祭床) 앞에두고 신좌(神座)가 있어,

신좌(神座)는 혼(魂)은 하늘로부터 망주석을 타고 내려와 무덤 속의 백(魄)과 결합하여,

정자각 뒤에 있는 신교(神橋)를 건너 정자각 뒷문으로 들어와 신좌에 머물며 흠향하는 곳으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의 제향일은 매년 양력 9월 23일 이라고 합니다.

 

 

 

정자각(丁字閣)에서 내려와 보니,

정자각 지붕의 잡상이 다른 왕릉에 비해 적은듯 하고 지붕위는 일부 파손된곳이 있어 보수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자각에서 조금 벗어나니 정릉(貞陵)의 능침이 멀리 들어 옵니다.

 

 

 

능침(陵寢)으로 오르기전 안내문에서 능침의 배치를 살펴보고,

 

 

 

왼쪽으로 나있는 소나무 숲길을 따라 능침(陵寢)으로 오릅니다.

 

 

 

정릉(貞陵)으로 본래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던 능 이었으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안암동으로 능지를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자,

현재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이장하게 되었고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하여,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 되었으며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습니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이 현종(조선)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 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 되었습니다.

 

 

 

서울 중구의 정동은 정릉이 처음 조성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貞)"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습니다.

 

 

 

봉분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으며 혼유석, 문인석, 석마, 각각 1쌍의 석양과 석호가 있는데,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있는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하며 석물도 원형이 아닌것이 많은데,

혼유석또한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이지만 혼유석은 원래의 것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석은 원래 5개였던 것을 2개만 가져다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년 7월 12일 ~ 1396년 9월 15일)는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로,

별호는 현비(顯妃),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 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와 경처(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에서 고려 충혜왕때 세도를 떨친 권문세가의 규수로 태어 났습니다.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혼인할 당시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살 가량 연하였는데,

이성계는 원나라의 동녕부를 원정해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 하였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꼈고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 씨와 정략적으로 혼인한 것이었으나,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태조의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그의 뛰어난 지략으로 조선 건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 하였던 인물 입니다.

 

 

 

사각장명등(四角長明燈)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장명등은 능묘의 능침 앞 중앙에 놓여 사자(死者)를 지키고 밝혀주는 상징적인 기능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으로 능역을 장식하는 역할도 담당했던 중요한 석물로서, 석등의 한 범주에 속하며..

이곳의 장명등은 조선왕릉 장명등 중 최초로 조성된 장명등이며,

조선 전,중기의 왕릉 장명등 가운데 유일한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대석, 화사석, 옥개석 형식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어 팔각 장명등(八角長明燈)형식과는 완연하게 구분되며,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을 1매의 통석으로 마련하고 화사석은 1매의 통석으로 전후로 화창을 표현하였는데,

정릉의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인 현, 정릉의 장명등 전통을 그대로 따랐으나 그보다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성 되었던 왕릉 장명등으로서의 격조를 살필수 있으나 상부의 주두가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났던 일화는 유명 합니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우물가에서 만났는데 이성계가 장수였을 시절,

목이 말라 어느 우물가에 급히 말을 세우고 마침 그곳에서 물을 긷던 한 여인에게 물을 청했는데,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떠 그 위에 버드나무 잎을 띄운 뒤 그에게 권했는데,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버들잎을 띄웠다는 여인의 설명을 듣고 이성계는 탄복해 청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1392년 조선이 개국 되자마자 현비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는데,

본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 입니다.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였고,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므로 태조가 공을 들여 조성했지만,

제3대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정릉의 위상은 바뀌게 되는데,

태종은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능을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기고,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를 허락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게 하였으며,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 했습니다.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폄하는 이뿐이 아니어서 1410년 8월 홍수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하였는데 청계천이 복원될 때 광통교(廣通橋)도 모습을 드러나,

조선 최초의 병풍석(屛風石)과 영저 영탁(靈杵 靈鐸)의 조각을 확인할 수 있는데,

612 년이 넘었음에도 보존 상태가 매우 좋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들보다 100년 이상 앞선 걸작품으로,

청계천을 들르시면 꼭 한번 볼만한 명품 입니다.

 

 

 

신덕왕후의 능을 태종 이방원이 푸대접한 이유는 그녀와의 알력 때문으로,

고려 말 권문세가였던 신덕왕후 강 씨의 가문은 이성계에게 정치 무대의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신덕왕후는 슬기롭고 사리가 밝은 여인여서 태조에게 신덕왕후는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 정치적 동지였던 셈입니다.

문제는 강 씨가 실질적인 개국 공신인 데다 태조 이성계의 총애가 있고 정도전, 남은 등 신흥사대부가 그녀의 편에 서있었기에,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해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으나 아들 방석의 왕위 계승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덕왕후 사후,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동복형인 방간이 자신을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으며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게 되었는데,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를 함께 모시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해 신위를 모시지 않았으며,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의 예에 따라 3품관으로 대행하게 했습니다.

이런 대우는 태종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200여 년 뒤인 선조 14년(1581) 삼사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중신들은 태조 능에 있는 건원릉 비에 신의·신덕왕후가 열거되어 있고, 강 씨가 차비로 서술된 점, 태조가 강비를 시책에 칭송한 것을 감안하면,

후대인들이 부묘를 폐하고 능을 옮긴 것은 천리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곳으로 천장한 지 260년 후인 1669년(현종 10년) 판부사 송시열은 현종에게,

"정릉이 태조 첫 부인의 능인데 태종의 어머니인 제릉(齊陵)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덕왕후를 종묘(태묘)에 배향하고,

능도 다른 능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송시열계 서인들이 집요하게 상소해 결국 현종은 정릉의 보수를 명하고 재실을 중건하고,

수직수호(능역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사람)를 둘 것을 명했으며,

또한 "계지술사(繼志述事)", 즉 "자손이 번성하고 선함을 영원히 전하는 경사" 라며 선대가 좋게 평가하리라는 이유를 들어,

송시열은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여 신덕왕후 강씨는 종묘에 태조의 계비로 추봉 되었으며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봉안되었는데,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는데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 입니다.

 

 

 

신덕왕후의 정릉의 처음 있었던 위치를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나 경향신문 문화체육관 근처로 추정해 왔었는데,

신덕왕후 능의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의 주한 미국대사관 영내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를 그곳으로 보기도 하지만,

외국 대사관 영내여서 발굴작업조차 할수없는 현실 입니다.

 

 

 

능침(陵寢)에서 제향공간인 정자각(丁字閣) 일원을 내려다 보고 내려가는 길을 잡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계비로,

조선 최초의 왕비로 태조의 총애와 신흥사대부의 비호로,

8왕자인 자신의 어린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에 올리는 권력욕으로,

사후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왕자의 난의 빌미가 되어 자신의 아들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며,

자신도 태조의 정성과 공들여 조성한 원래의 정릉(貞陵)에서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으로 밀려나,

지금의 능에서 260여년을 피폐하게 지냈던 비운의 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와 함께,

조선초기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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