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에,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청계산 옥녀봉 자락에 있는,

과지초당(瓜地草堂)과  곁에 있는 추사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 과천시 추사로 78 (주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추사박물관으로,

박물관의 외관은 "먹과 벼루" 모양으로 형상화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추사박물관 앞에는,

조선 후기 성리학을 대표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최고의 경지에서 노년을 보낸 별서(別墅)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어 초당을 먼저 찾아 봅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 앞에는 네모난 단위에 장독을 묻어둔듯 보이는데,

"옹정(甕井)" 이라는 독우물로 추사 김정희는 이곳 과지초당에 머물면서 직접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다고 하며,

독(항아리)을 묻어 우물을 만들었기에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복원, 조성하면서 이 독우물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소박하고 아담한 20평 규모의 초당(草堂)과 대문채와 담장으로 일각을 이루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서면 누마루앞에 추사(秋史)의 동상이 서있고,

앞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네모난 연못을 앞에두고 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의미는 "하늘의 덕성은 원만하고 땅의 덕성은 방정하다는 의미"이며,

일반적으로 도교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뿌리는 삼한시대 이전으로 5,000년이 넘는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상입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의 마당에는 추사(秋史)의 동상이 있어,

추사체(秋史體)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로,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1824년한성부 판윤(漢城判尹,현 서울시장)으로 있던 시절 서울과 가까운 이곳 과천에 마련한 별서로,

그가 13년 동안 기거했던 곳으로 1837년(헌종 3)에 김노경이 세상을 떠나자,

추사(秋史)는 부친의 묘를 이곳에서 가까운 옥녀봉(玉女峰) 중턱 검단에 안치하고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렀습니다.

그뒤로도 추사(秋史)는 이곳 초당을 자주 찾았으며 제주 및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을 찾았으며, 

1852년(철종 3) 8월 이후부터 185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말년의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기도 합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의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으로,

 

 

 

과지초당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에 있는 글로,

禿盡千毫 (독지천호)           천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

摩穿十年 (마천10년)      70년동안 열개의 며루를 갈아 없애고

大烹豆腐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오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최고 훌륭한 모임은 남편 아내와 딸 손자라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71세 때 쓴 예서체 대련으로 "摩穿十年(마천10년)" 이란,

추사(秋史)가 고우(故友)였던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글 입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의 소박한 현판으로,

글씨는 대한민국 추사체의 대가(大家) 가산(佳山) 최영환(崔泳煥)이 썼고, 이조(里朝) 임만선(任萬善)이 조각하였습니다.

 

 

 

과지(瓜地)란 글자 그대로 하면 오이밭을 일컫는 말이겠으나,

과천 주암동은 예나 지금이나 참외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참외밭을 일컫는 것일수도 있어,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참외밭이 있는 초가집"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추사(秋史)의 과천 시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김정희(金正喜)의 대표적인 묵란도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전해지고,

보물1978호인 "대팽고회(大烹高會)"와 보물 제1685-2호인 "대련(對鍊)"이 있으며,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썻다는 서울 강남 "봉은사 판전 현판 (奉恩寺 板殿 懸板)" 등이 있습니다.

 

 

 

추사의 "완당전집" 제9권에 나오는 "가을날 과지초당에 거듭 오다(秋日重到瓜地草堂)"의 일부분으로,

出門秋正好   문을 나니 가을이 정히 좋은데

携衲更堪憐   중을 끌어 다시금 어여쁘다네

款款三峯色   정겨움 내보이는 삼봉의 빛은

依依五載前   가물가물 다섯 해 이전이로세

靑苔仍屋老   푸른 이끼 낡은 집에 그대로 있고

赤葉漸林姸   붉은 잎은 수풀에 물들어 곱네

飄泊西東久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山中銷暮煙   산 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있네

 

 

 

북청유배에서 돌아온 추사(秋史)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 갔다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월의 흐름과 도시화로 인해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수 없지만,

과지초당(瓜地草堂)은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연못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전하며,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다고 하여 "청관산옥(靑冠山屋)" 으로도 불리웠다고 합니다.

 

 

 

추사(秋史)가 죽기 전까지 4년을 머물렀던 과지초당(瓜地草堂)은,

과천시에서  2007년에 2,055㎡의 터에 한옥 2동(66㎡) 규모로 복원하고,

초당 인근에 있던 항아리로 만든 "독우물"도 옮겨 놓았으며 소규모 공원과 함께 2007년11월 29일 준공 하였습니다.

 

 

 

과지초당의 뒤로 돌아가면 벽면의 끝부분에 "치원 황상과 추사가"라고 쓴 글이 있어,

거친 산과 들 늙은이 지팡이 짚고 오니/   백소어(白小魚)는 드넓은 연못에서 노니네

기이한 글 묵직한 박아(博雅)의 선비시오/   빼어난 모습 갓 태어난 아이와 같구나!

시에서 본 송문석(松文石)을 구태여 알아보니/   그 누가 눈앞의 죽엽비(竹葉碑) 기억할까?

가는 풀 이름난 꽃 안개 버들 언덕에/   꾀꼬리 목청 고운 그때 풍경 어떠할지

추사(秋史)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치원 황상(巵園 黃裳, 1788~1870)이 추사의 집을 방문하여 과지초당을 노래한 시(詩)로,

치원 황상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가장 아꼈던 강진 시절의 제자로,

당대의 석학이자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학문적 교우관계를 맺을 만큼 학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학자여서,

1848년 제주도 유배 시절 추사(秋史)는 황상의 시(詩)에 반하여 “두보(杜甫)를 골수로 삼고, 한유(韓愈)를 골격으로 삼았다”라고 극찬 하였으며,

1856년 추사와 산천 김명희 형제는 그의 시집 "치원유고(巵園遺稿)"에 서문을 써 주기도 하였으며,

1853년 황상이 추사를 찾아갔을 때 황상이 과지초당(瓜地草堂)의 정경을 묘사한 시(詩)입니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을 살펴보고 추사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박물관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지로,

과지초당에서 들어가면 2층의 전시관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어,

추사(秋史)의 대표작 이라고 할만한 세한도(歲寒圖)가 보이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정조10~철종7년)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으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오석산밑 추사고택에서 조선 21대 영조임금 2째딸 화순옹주(월성위,부군 김한신:오위도총관 벼슬)의 증손자로 태어 났으며,

고조할아버지는 영조때 노론 거두로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이며, 할아버지는 승지와 병조판서를 지낸 김이수로 명문집안 출신 입니다.

서울(한양)에 사는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어릴때 양자로 입적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개가 뛰어나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노론으로 실학자이며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가, 서예가로 성장하였는데,

추사는 1819년(순조 19년)문과 급제하여 충청우도(충남)암행어사때 안동김씨 비인현감 김우명을 파직시켰으며,

성균관 대사성(순조아들 효명세자 사부)에 이어 예조참의, 병조참판을 역임하였으나,

대쪽같은 성품으로 세도가 안동김씨(24대헌종때)의 표적이 되어 파직되어 제주도 귀양(1840~1848)에서 쉬임없는 학문연마로 추사체를 완성하었고,

북청귀양(1851~52) 후 친부 김노경(1766~1837)의 한성판윤시 과천시 주암동 소재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복귀하여,

임종시까지 4년(1852~56)간 거주하며 여생을 마쳤습니다.

 

 

 

추사박물관은 추사(秋史)를 종합적으로 연구, 전시, 체험할 수 있도록,

추사의 생애실, 학예실, 후지츠카 기증실,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휴게공간, 뮤지엄숍, 교육실을 갖추고 있으며,

 

 

 

추사의 생애실 에는,

추사가 24세 되는 해에 대과에 급제를 하게 되고,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사신 행렬을 따라 꿈에 연경 행을 하게 되어 추사의 여정을 그려놓았는데, 

연경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학문적 도움을 받은 추사는,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사신 행렬에 동행한 역관들을 통하여 중국 학계의 새로운 소식을 접하며,

또한 옹방강 과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학문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나가게 됩니다.

 

 

 

추사(秋史)가 8세 때 예산의 친부에게 보낸 한문으로 된 안부 편지로,

아버지와 동생을 염려하는 착한 아들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친부 김노경(金魯敬)은 이틀 후인 12일, 추사의 편지 여백에 글을 써 답장을 보냅니다.

 

 

 

추사(秋史)의 제주도 유배지 모형으로,

추사는 정적이였던 안동 김씨 세력의 탄핵을 받아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의 대정현에 유배 되었는데,

조선 시대의 대정현(大靜縣)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일대로서,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유배지로 인식되고 있는곳으로 대정현에 마지막으로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힘썼으며,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쉬지 않고 붓을 잡아 쓰는 일에 매진하여 독창적인 추사체를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완성 하는 등,

대정현에서의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왼쪽은 추사(秋史)가 예안이씨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며,

오른쪽은 소치(小癡) 허련(許鍊) 서첩으로 허련이 추사가 쓴 "석파의 난권에 쓰다"의 한 구절을 쓴 글이며,

소치(小癡)는 추사가 귀양온지 넉달만에 추사를 찾아왔고,

귀양살이중 세번이나 찾아와서 뒷바라치 해준 제자로 남종화의 대가로 진도 운림산방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인 "세한도(歲寒圖)"로,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로 23㎝, 가로 69.2㎝의 크기로,

제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던 추사(秋史)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北京)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1844년(헌종 10)에 답례로 그려준 것으로,

추사(秋史)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 하였는데,

추사(秋史)의 농축된 내면 세계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의 담백하면서도 고담한 분위기는,

문기(文氣)를 비롯하여 문인화가 지향하던 사의(寫意)의 세계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국보 제180호로 추사(秋史)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현판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보관 하고 있으며,

1851년 제2 유배지인 북청에서의 1년간 유배중 쓴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보호하는 비각 현판으로,

"진흥왕이 북쪽을 순시한 옛 영토"라는 의미의 예서체 글씨 이며,

고신라의 고졸한 글씨미학이 비첩(碑帖)이 혼융된 추사의 붓끝에서 동아시아의 독자적 미학으로 웅장하게 재탄생 했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획의 뻗침이나 글자의 생김새 등이 거칠 것 없고 어린 아이가 쓴 것처럼 고졸한 글씨가 특징인 추사(秋史)의 마지막 작품으로,

화엄경을 새겨 놓은 목판 3175장이 보관되어 있는 봉은사 판전의 현판으로 남호의 부탁으로 쓴 판전(板殿)편액으로,

"칠십일과 병 중에 씀"으로 추사가 세상을 뜨기 전 3일 전에 썼다고 합니다.

 

 

 

추사(秋史)는 "옛 것을 통해 새 것을 창조한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정신으로,

전한(前漢)시대의 예서체 비문 글씨나 청동 거울 뒷면에 새겨진 전서체와 예서체 글자를 수없이 임서(臨書)하여 독특한 추사체를 창조한 인물로,

우리나라 역사상에 예명(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어,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는데,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산심일장란(山深日長蘭)"으로 불리는 목란도로,

추사(秋史)의 난초 그림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화제는 산이 깊어 날이 길고(山深日長), 인적이 고요한데 향기가 스며드네(人靜香透 山深日長蘭)입니다.

 

 

 

추사박물관 에서는 추사(秋史)의 수많은 인장을 볼수 있는데,

김정희(金正喜)는 호가 많았는데 호를 새긴 인장이 200개가 넘는다고 하며,

호에 따른 낙관도 많아서 여러 가지 모양의 낙관을 남겼는데 그렇게 많은 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계단으로 아랫층의 전시실로 내려가 봅니다.

 

 

 

1층에는 추사(秋史)의 학예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

 

 

 

19세기 학문의 흐름과 추사(秋史)의 학예교류와 내용등을 살펴 볼수 있고,

 

 

 

추사(秋史)가 사용했던 붓과 벼루의 복제품이 전시 되어 있으며,

 

 

 

"마천십연(磨穿十硏)"으로 42×44cm 크기로 "완당전집" 권3 "여권돈인(與權敦仁)" 32에 실려 있으며,

과천시절 절친인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는,

글씨에 대한 추사의 노력을 말해주는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옛 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면서,

한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못 한다며 거절합니다.

승려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추사(秋史)의 서체별 주요 작품으로,

해서체의 이위정기(以威亭記) 탁본(拓本)으로 1816년(병자년) 추사 31세 때 작품으로,

중국 옹방강의 글씨체를 그대로 따랐으며 광주 남한산성에 이위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당시 수어사인 심상규가 글을 짓고 추사가 글씨를 썼습니다.

 

 

 

26.7×33.8cm의 크기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임한경명(臨漢鏡銘)"으로,

추사(秋史)의 40대 후반 또는 50대 초반의 예서체 글씨 이며,

 

 

 

28×53cm의 크기의 "답호운대사(答浩雲大師)"로,

1856년 71세때 과천시절 호운대사(浩雲大師)에게 보낸 서찰로 추사(秋史)의 서체를 차례로 볼수 있습니다.

 

 

 

다시 계단을 통하여 내려가면 지하 1층에는,

 

 

 

출입구에서는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로 재미있게 해둔 포토존을 볼수가 있고,

 

 

 

지하층에는 추사 박물관의 조성에 큰힘이 되게한 후지츠카 기증실을 따로 마련해 두어,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와,

아들 아키나오(藤塚明直, 1921~2006) 씨가 기증한 추사 친필 글씨 26점과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는 한학자이며 문학박사이며,

호는 소헌(素軒), 당호는 망한려(望漢廬)로 도쿄대학 중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제8고등학교 교수, 경성제국대학 교수, 대동문화학원(大東文化學院) 대학장을 역임했으며,

후지츠카는 추사(秋史)를 경학의 대가로 재조명한 학자로,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무상으로 주었으며,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2006년 2월 추사 친필과 관련자료 2,700여 점을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하고,

추사연구에 써달라며 200만 엔(약 2천만 원)을 기부하였고,

그의 딸은 추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아 3대에 걸쳐 추사(秋史)와 세한도(歲寒圖)와의 깊고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하층에 마련된 후지츠카 기증실과 기획전을 살펴보고 나오면,

 

 

 

한쪽에는 체험실이 있어서 탁본체험을 해볼수 있으며,

 

 

 

붓으로 글씨와 그림을 직접 그려볼수 있어서,

자녀들과의 교육 공간으로도 좋은곳 입니다.

 

 

 

추사(秋史)의 생애와 그의 발자취와 작품들을 살펴볼수 있고,

글씨를 향한 열정이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는 구절로,

추사(秋史)에 대해 더욱 많은것을 알게하고 일깨워 주는곳으로,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과 추사 박물관의 뒤늦은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