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의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를 찾았습니다.

 

사찰의 경계가 되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인 일주문((一柱門)으로,

부석사(浮石寺)가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라고는 하나 명성이나 유물등 어느것에 견주어도 비교될수 없을 정도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찰(名刹)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고찰(古刹)을 찾으면,

산문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숲길을 걷는것이 사찰을 찾는 즐거움중 하나인데,

부석사로 향하는길은 오래전에는 양쪽에 과수원과 집도 몆채가 있어,

민가에서는 국수등과 과일을 팔기도 하였고 숲길이라고 하기엔 모자람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은행나무가 제법 자라서 가을이면 은행나무 단풍으로 산사의 품격을 갖추어 가는듯해서 다행입니다.

 

 

 

은행나무 길을따라 오르다 보면,

천왕문(天王門)에 이르기전 왼쪽에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가 있어,

통일신라 시대의 당간지주로 높이 4.28m이며 두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으며,

기단부는 현재 완존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석사 당간지주(浮石寺 幢竿支柱)는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당간지주란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 幢竿支柱)라고 합니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펼친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義湘)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 의상종(義湘宗)이라고도 불리는것도 여기에서 유래하며,

의상(義湘)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곳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으며,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 하였으며,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 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 만월당(滿月堂), 서별실(西別室), 만세루(萬歲樓), 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로 들어가는 길의 왼쪽에는,

부석사 박물관(浮石寺 博物館)이 있으나 공사중여서 들어갈수 없습니다.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부석사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데,

부석사는 경사지를 따라 여러 단의 석단(石壇) 위에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서 범종루(梵鐘樓)가 보이며,

 

 

 

범종루로 들어가는 길의 양쪽 옆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쌍탑인 "부석사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이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3층석탑으로 부석사에서 동쪽 약사골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이건했으며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삼층석탑과 같은 형식이며, 

 

 

 

높이는 동탑이 3.60m, 서탑이'3.77m으로 두탑의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고 하며,

기단과 탑신부의 몸둘레에는 기둥을 본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조각을 두었고,

몸돌은 모서리에만 두었으며 몸돌을 덮고 있는 각층의 지붕들은 밑면에 4단씩 받침을 두었는데,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불사리탑이건기(佛舍利塔移建記)"에 의하면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오층탑으로부터 석존사리 다섯과를 분안(分安)받았다고 전합니다.

 

 

 

범종루(梵鐘樓)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보이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범종루는 경사진 지형에 누각과 문의 기능을 겸하여 지은 건축물로,

2층 뒤쪽 가운데 한 칸을 뚫어 밑에 계단을 세워 안양문이랑 향하게 하였는데,

고개를 숙여야만 그 아래로 지날수 있어서 "부처를 만나기전에 공경의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이 포함 되어 있는듯 합니다.

 

 

 


범종루(梵鐘樓)란 이름만 있을 뿐 범종은 없고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는데,

종은 따로 왼쪽에 종각을 두어 찾을수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의 지붕은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인 뒷부분은 측면이 맞배지붕의 박공 부분여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범종각(梵鐘閣)을 별도로 두어 범종을 두었으며,

 

 

 

안양루(安養樓)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위치한 누각으로,

안양루(安養樓)에서의 풍광은 천하일품 여서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경치를 시문으로 남겨,

누각 내부에 부석사의 현판기문들이 있어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를 비롯한 많은 시문과 편액들을 볼수 있습니다.

 

 

 

안양루(安養樓)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앞에서 보아 팔작지붕 건물이며 누각의 앞쪽과 안쪽의 편액이 다른데,

앞쪽의 난간 아랫부분의 편액은 "안양문(安養門)", 위층 마당 쪽은 "안양루(安養樓)"라고 씌여 있어,

앞쪽에서는 문의 역활을 하고 안쪽에서는 누각의 기능을 하고있어 2가지의 기능을 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극락이란 뜻을 가진 "안양((安養)의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므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해 있슴을 표현한 구조 입니다.

 

 

 

안양문(安養門)을 지나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배경으로 석등(石燈)을 볼수있어,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石燈)"으로,

높이 2.97m의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으로,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 되었으며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습니다.

 

 

 

석등(石燈)은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 되었으며,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고,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 되었으며,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습니다.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 합니다.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浮石寺無量壽殿)"으로,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 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을 봉안하고 있는곳으로,

정면 가운데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귀경길에 부석사에 들러 쓴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화강석의 높은 기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정면 중앙의 3곳에 돌계단을 두었으며,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배흘림이 뚜렷한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살창을 달고 측면은 벽으로 막았으며 뒷벽에는 가운데에 판문과 그 좌우로 붙박이 살창을 달았습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공포는 기둥 위에 첨차와 살미[山彌]를 층층이 짜올린 주심포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첨차 끝부분이 쌍S자형의 곡선으로 된 것이 특징 입니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기둥(고주.高柱)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당가,唐家)을 만들었으며,

건물 내부에서 볼 수 있는 헛첨차와 각 첨차 밑면의 연화두형수식, 주두와 소로의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는 점, 솟을대공 등에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귀중한 문화재 입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모신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으로,

 불상 높이 2.78m, 광배 높이 3.8m이며 무량수전 안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에 특징적인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두 손이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보수하였다고 전하여,

원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었는지는 불확실 하지만 불상이 봉안된 전각의 명칭이 무량수전이고,

부석사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1054년)의 비문에 "보처(補處: 주불의 좌우에 모신 보살)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불상의 명칭은 아미타불로 추정되며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이어 제작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불상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 기법을 보이는 우수한 예에 속하며,

진흙으로 만든 불상인 소조상(塑造像)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 공포의 구성 형식, 가구재의 구성 등에서 주심포 건물의 기본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건축물과 비교할 때 장식적인 요소가 적으면서 목조 건축의 형태미와 비례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로서,

국보 제15호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고려시대 불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건축물 입니다.

 

 

 

참고로, 부석사(浮石寺)의 모형도를 보면,

무량수전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오른쪽으로 약 30도 정도 틀어져 있슴을 볼수 있는데,

이유는 해가뜨는 정 동쪽을 보기 위해서 무량수전(無量壽殿)의 건물만 30도 정도 방향을 틀어서 지은 것이라 합니다.

 

 

 

무량수전 왼편에는 부석사의 이름이 있게한 "부석(浮石)"이 있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때 의상 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의상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智嚴三藏)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이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 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를 하였는데,

이때 선묘(善妙) 신룡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치게 되어,

이 돌을 "부석(浮石)"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하며,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 영조 때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안양루(安養樓)에서 산아래를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일품으로,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때 가을의 해질녘에 이곳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모습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정도로 머리속에 각인 되어 부석사를 여러번 찾았었는데..

가을날의 해질녘은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빼어난 경치 입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마당 한켠에는 노거수 배나무가 한그루 있어,

 

 

 

배나무 꽃(梨花)이 만개하여 찾은이들이게 또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는 맞배지붕으로 1칸규모의 작은 전각인 "선묘각(善妙閣)"이 있어,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선묘(善妙)라는 인물을 모신 건물로,

가구의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걸 보아 최근에 세워진 건물인 듯하며..

 

 

 

선묘각(善妙閣)의 내부에는 1975년에 그려진 선묘(善妙)의 영정이 걸려 있습니다.

 

 

 

무량수전 옆의 높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는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榮州 浮石寺 三層石塔)으로,

높이 5.26m의 크기로 보물 제249호로 지정되었으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옥신 중앙에서 얕은 방형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구(舍利具)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鐵製塔)과 불상편(佛像片), 구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 하였습니다.

 

 

 

삼층석탑(三層石塔) 옆에는 조사당과 자인당,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浮石寺祖師堂)"으로,

고려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작은 건물로서 부석사 조사당은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장여(長欐)에 기록된 묵서(墨書)에 따르면 1377년(우왕 3) 원응(圓應)국사가 다시 세웠고,

1490년(성종 21)에 중수하였다고 하며 이후 조사당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 되며,

1573년(선조 6)에는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1709년(숙종 32)에는 기와를 교체 하였습니다.

1916년에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익공 위에 보(樑)와 얹히는 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가로 보조재인 장여(長欐)에서,

고려시대 중건과 조선 초기의 공사 내용이 기록된 묵서(墨書)가 발견 되었으며,

1996년에는 서까래와 기와를 교체하였고, 2005년에 도리 등 부식된 목재와 함께 기와를 교체 하였습니다.

 

 

 

내부에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상(像)을 봉안하고 있어,

의상대사(義湘大師)는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으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으며,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로 신라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세수 78세로 입적 하였습니다.

의상(義湘)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으나,

670년(문무왕 10)에 환국 하였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것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676년(문무왕 16)에 문무왕의 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일승화엄종(一乘華嚴宗)을 개창(開倉)하기 시작하여 많은 화엄종장(華嚴宗匠)을 배출하여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화엄대덕(華嚴大德)으로 알려 졌으며,

의상대사가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팔공산의 미리사(美里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공주의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춘천의 화산사(華山寺),

양산의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대구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서울의 부악산 청담사(淸潭寺) 등으로,

이들 사찰들을 일명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 합니다.

 

 

 

조사당(祖師堂)의 벽면에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인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린 6폭의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인 보장각(寶藏閣)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조사당의 벽면에는 새로 그려둔 벽화와 걸개 그림들이 있으며,

원래 있던 벽화들은 1916년 건물수리시 떼어내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骨擔草)가 있어,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李滉)의 浮石寺 飛仙花詩(부석사 비선화시) 입니다.

擢玉森森依寺門(탁옥삼삼의사문)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겼는데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러 주네

杖頭自有曺溪水(장두자유조계수)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1,300년 이상을 살아온 노란꽃이 탐스러운 골담초(骨擔草)를 승려들은 "비선화(飛仙花)"라 불렸고,

퇴계 이황이 이곳을 찾아 시(詩)를 남기고 나서는 "선비화(禪扉花)"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조사당을 나와 오르던 길을 조금 더 가보면,

 

 

 

응진전(應眞殿)과 자인당(慈忍堂)이 나란이 자리해 있고,

으른쪽의 응진전의 뒤편 비켜선 곳에 단하각(丹霞閣)이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자인당(慈忍堂)으로,

원래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구조이며,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 했습니다.

 

 

 

 

 

자인당(慈忍堂)에는 보물 제1636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이며 이 석불은 원래 부석사 동쪽에 위치했던 동방사지(東方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 온 것으로,

삼존불 가운데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보물 제220호 "영주북지리석조여래좌상(榮州北枝里石造如來坐像)"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석조석가여래좌상과는 얼굴의 인상이나 대의 처리 신체 비례 등이 다르며 석조석가여래좌상은 광배가 없고 불신과 대좌는 완전한 상태입니다.

부석사 자인당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 후반에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행한 석불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통일신라 석굴암 본존의 항마촉지인 계열을 따르는 중요한 석불으로,

내의와 꽃무늬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반의 지방 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습니다.

 

 

 

자인당 곁에 있는 응진전(應眞殿)으로,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으며,

응진전(應眞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으며 응진전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응진전(應眞殿)의 내부에는,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응진전 오른쪽 뒤편에 맞배 지붕의 한 칸짜리 "단하각(丹霞閣)"이 있어,

 

 

 

단하각(丹霞閣)에는 작은 나한상이 왼쪽 무릎위에 푸른색 쥐 한 마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형상으로 봉안되어 있는데,

1995 초간된 "부석사" 에서는 “단하각에 대해 ‘단하(丹霞)’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를 모신 것”이라며,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러기에 도량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선방 근처에 지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아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봉황산부석사개연기(鳳凰山浮石寺改椽記)」 등에는 창건연대를 676년(신라 문무왕 16)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창건 후 부석사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에 병화로 소실 되었다고 전하며,

경내에 있는 대석단(大石壇)과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이 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음을 볼 때,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에는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부석사에 머물면서 부석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원융국사는 1041년(정종 7)에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통(華嚴宗統)을 이어받았고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무량수전(無量壽殿)은 1358년(공민왕 7)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 큰 피해를 입었고,

1376년(우왕 2)에 진각국사(眞覺國師) 원응(圓應)이 고쳐 지었으며,

1611년(광해군 3)에는 보가 비바람에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듬해 중수하면서 서까래도 함께 교체하고 단청도 다시 하였습니다.

「무량수전불상개금기(無量壽殿佛像改金記)」와 「무량수전미타존상개금기(無量壽殿彌陀尊像改金記)」에 따르면,

1723년(경종 3)과 1767년(영조 43)에 각각 본존불의 금칠을 다시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는 조사당과 함께 해체수리공사가 이루어 졌으며,

1969년과 1999년에는 기와를 교체하였으며 2001년에 주변 정비와 함께 정밀실측조사가 실시 되었습니다.

 

 

 

부석사(浮石寺)는 양산 통도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오는 6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전망이라는 기쁜 소식이 있어 우리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이 더 하며,

오래전 부터 여러차례 찾았지만 다시 생각나는 묘한 매력이 있는 사찰입니다.

경북 영주에는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풍기인견과 유명한  풍기 인삼,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선비촌,

해질녘 외나무 다리가 아름다운 무섬마을 등 가볼곳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이라 여겨지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해질녘의 전망이 아름다운곳 경북 영주의 부석사(浮石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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