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禮山)을 여행하면서,

예산군 신암면에 있는 추사 김정희 기념관(秋史金正喜記念館)을 찾았습니다.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으로도 불리는 추사 김정희 기념관은,

추사고택(秋史古宅)과 추사(秋史)의 묘소가 있는곳에 있어 고택과 함께 돌아보면 좋습니다.

추사고택에 관한 자료는 아래에서 살펴볼수 있습니다.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_170508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 앞에는 여러개의 조형물이 있어,

권창륜의 2008년 작품 추사와인보 (秋史와印寶)로 전면에는 사야(史野) 문자를 돌출시켜 인보와 문자의 조화를 주었으며,

추사(秋史)의 인보 200과 중 대표적인12과를 음,양각으로 전각하여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2008년 강관욱 작품의 "고독한 예술혼 (孤獨한藝術魂)"으로,

고고한 예술혼을 지닌 추사(秋史)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여,

 "옥돌괴" 위에서 망망대해(望望大海)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작품으로 표현 하였으며,

아래에는 "遊天戱海(유천희해)"의 글씨가 있어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 라는 의미 입니다.

 

 

벽면에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로,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려 졌으며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인 세한도(歲寒圖)와,

추사(秋史)의 글들을 볼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동상으로,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 철종 7년(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로,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으며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秋史體)가 있으며 난초를 잘 그렸습니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秋史金正喜記念館) 입니다.

참고로 추사의 유배지였던 제주에도 기념관이 있으며,

경기도 과천에도 같은 성격의 과지초당(瓜地草堂)과 추사박물관이 있어,

추사(秋史)는 태어난곳과 유배지 그리고 말년을 보낸곳에 모두 기념관등이 있어 이례적 입니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과 추사박물관과 관련한 내용은 아래에서 살펴볼수 있습니다.,

과천 과지초당, 추사 박물관_160515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추사(秋史)의 초상화로 그에 대한 요약을 볼수있고,

 

 

 

추사(秋史)의 생애의 중요한 부분들을 디오라마로 표현해 두어 살펴보면,

추사의 탄생으로 추사(秋史)는 예산 출신으로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추사(秋史)는 탄생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태어나던 날 예산 향저(鄕邸)의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 버렸다가 첫 울음소리에 다시 샘 솟았다고 하며,

 

 

 

우물과 마찬가지로 뒷산인 오석산과 祖山(조산)인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는 일화의 내용 입니다.

 

 

 

추사(秋史)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세살때 붓을쥐고 글씨쓰는 흉내를 내는 천재성을 보였다고 하며,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이에 관해서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6세 때 그가 쓴 입춘첩을 집 대문에 붙여 놓았더니 지나가던 실학자 박제가가 보고 집 문을 두드려 글쓴이가 누구인지 물었고,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안 박제가는 그가 후일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감탄 했으며,

이듬해에도 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나가다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고 물어,

어린 김정희가 쓴 것을 알고 채제공은 “이 아이는 장차 명필로 이름을 떨칠 거요.

그러나 서(書)와 기(技)에 능하면 운명이 기구할 테니 글씨를 금하고 글공부를 잘 시키시오.”라고 우려 섞인 감탄사를 던지고 갔다고 합니다.

 

 

 

추사(秋史)는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 하게 되었는데,

그의 가문은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서녀로 영조로부터 큰사랑을 받았던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고,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로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 였습니다.

 

 

 

추사(秋史)는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북학파(北學派)의 일인자인 박제가(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북학파(北學派) 사상을 배우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학통을 계승 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809년 겨울 24세 때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이 동지부사(同知府事)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으며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시기라고 합니다.

 

 

 

추사(秋史)의 제주도 유배생활의 모습으로,

1840년 헌종 6년 추사가 55세 되던 해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모함을 받아,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 왔는데,

추사체(秋史體)는 9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 되었으며 벗들과 제자들이 귀양지를 찾았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제주인들이 찾았다고 합니다.

 

 

 

추사(秋史)의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境)" 글씨로,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는 진흥왕이 함흥지역을 순수(巡狩)하고나서,

군신(君臣)이 모여 축하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함경도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碑閣)의 현판 글씨 입니다.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에서는 추사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을 살펴 볼수 있어,

 

 

 

권돈인(權敦仁)의 시(詩)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와 추사의 "계산무진 (谿山無盡)", 서언교필결후 (書圓嶠筆訣後),

인천안목(人天眼目), 임한경명(臨漢鏡銘), 지란병분(芝蘭竝芬), 증청람란(贈晴嵐蘭), 계산무진(谿山無盡)등 많은 작품들을 살펴볼수 있으며..

 

 

 

추사(秋史)의 대표작중 하나인 국보제180호 "세한도(歲寒圖)"이며,

세한도는 1844년 완당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 (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등 변함없이 사재의 의리를 지켜준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추사의 편지 입니다.

나무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 반은 神이 되어 있는 것을 보네

이 神의 이름을 세한도라고 함은 / 쓰러져 있는 내 생의 반을

일으켜 흰 눈 속에 세워두니 / 이제서야 푸른 솔빛을 두르고

부끄러움 없이 대할 수 있는 / 이 하늘의 뜻을 깨달음의

절창 한 소절을 홀로 소리없이  / 만고의 흰 눈 속에 묻혀 불러보네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의 추사와 관련한 많은 작품들과 자료들을 둘러보고,

 

 

 

추사(秋史)의 유품인 인보(印寶)들로,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 에서는 추사(秋史)의 다양한 인장을 볼수 있는데,

김정희(金正喜)는 호가 많았는데 호를 새긴 인장이 200개가 넘는다고 하며 호에 따른 낙관도 많아서 여러 가지 모양의 낙관을 남겼습니다.

 

 

 

유명한 이야기인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의 글로,

추사(秋史)가 자신의 벗인 권돈인(權敦仁)에게 보낸 편지에서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라고 썼는데,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라는 내용으로 부단한 노력의 정도를 알수있는 하는 대목이며,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추사체(秋史體)가 완성된 것이라 생각하니 경외심이 일어 납니다.

 

 

 

추사 기념관(秋史 記念館)에는 곁에 있는 추사고택(秋史古宅)의 모형도 볼수 있어,

추사고택과 관련한 내용은 여기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_170508

 

 

 

박불관을 나와 추사고택을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나옵니다.

 

 

 

주차장 옆, 추사고택(秋史古宅)앞에는 체험관이 별도로 있어,

 

 

 

체험관 앞에는 포토존을 멋있게 꾸며두어서 인기가 많은데,

찾는이들의 신발을 벗게 만들고 있습니다.

 

 

 

추사 체험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용할수 있으며,

 

 

 

체험관 에서는 탁본과 난초그리기, 추사체 써보기등 다양한 체험을 할수 있고, 

추사와 관련한 다양한 기념품도 구입할수 있습니다.

 

 

 

예산(禮山)은 예(禮)와 덕(德)을 숭상한 땅이란 이름의 예덕(禮德)으로 불리기도 했었는데,

이 지방에는 유독 예(禮)와 덕(德)이 들어간 산과 지명 이름이 많으며 보부상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탄생지에서 추사(秋史)에 대해서 많은것을 알게 해주는곳 "추사 김정희 기념관(秋史金正喜記念館)"으로,

예산을 여행 하시면 인근의 윤봉길의사 유적지와 함께 찾아볼만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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