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의 정자 문화재 탐방에서,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화림동(花林洞) 계곡의 정자, "군자정(君子亭)"을 찾았습니다.

 

옛부터 화림동(花林洞) 계곡의 "팔담팔정"은 유명한 명소였는데,

팔담팔정(八潭八亭)은 여덟 개의 담과 여덟 개의 정자를 의미하며,

화림동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에 자리한  멋진 정자들은 이제는 거연정(居然亭)과 군자정(君子亭) 그리고 동호정(東湖亭) 3개의 정자만이 남아 있으며,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근자에 복원된 농월정(弄月亭)을 더해도 절반만 남아 있는셈 입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0호로 지정된 군자정(君子亭)으로,

서하면 봉전마을은 정여창(鄭汝昌)의 처가가 있는 마을로서 정여창이 처가에 들러 유할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詠歸臺)에서 유영 하였던 곳에,

정선 전씨(旌善 全氏) 입향조(入鄕祖)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 공의 5대손인 전세걸(全世杰), 전세택(全世澤)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君子亭)으로 칭하였으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고 하며,

정여창(鄭汝昌)은 김굉필(金宏弼, 1454~ 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이황(李滉, 1501~1570)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5현 이라는 동방오현(東方五賢)에 드는 인물입니다.

 

 

 

군자정(君子亭)은 화림동(花林洞) 계곡의 거연정으로부터 하류쪽으로 1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나 정면의 주칸을 5자, 측면의 주칸을 4자 정도로 잡아 규모는 작은 편이며,

중층의 누각 건물이며 처마는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천연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세운 중층 누각건물로서,

내부에는 방을 들이지 않고 모두 틔워 놓았고 정면의 우측으로 판재로 만든 계단을 두어 누로 오르게 하였고,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15~18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집채만한 영귀대(詠歸臺)의 암반에 높이에 맞추어 기둥을 세운 모습으로,

기둥에는 나무의 옹이가 그대로 남아 있어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최대한 살린 자연스러움이 보입니다. 

 

 

 

군자정(君子亭)의 현판이며,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여러개의 君子亭(군자정)이 있어,

보물로 지정된 "안동임청각정침군자정(安東臨淸閣正枕君子亭)"과 청도 柳湖蓮池(유호연지)의 君子亭(군자정),

그리고 영주 오계서원(迂溪書院)의 군자정(君子亭)이 있어 주로 영남지방에 있슴을 알수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는 여러 시판들을 볼수 있으며,

 

 

 

2개의 군자정(君子亭) 기문(記文)외,

 

 

 

윤수정(尹守正)의 군자정(君子亭) 칠언절구로,

君子亭

亭前염염碧파光 亭下盤陀白玉床  출렁거리는 물은 푸른 구슬처럼 빛나 정자 받치는 돌 모래는 백옥 상일세

巖花似笑仙源夢 山葉堪成曲水觴  벼랑에 핀 꽃은 꿈에 본 신선들 웃음  산에서 지는 잎은 곡수에 띄우는 술잔

半醉靑華孤鶴月 朗吟玄圃六鼇霜  반쯤 취해 보는 외로운 초승달 푸르고   삼신산 신선나라 예서 멀지 않을 듯

五馬遲遲芳草路 新林高土臥西壓  망아지는 향기로운 꽃길에서 가는 듯 조는 듯 새 옷 입은 숲은 서쪽을 가리고 누웠는데   

癸亥春日 知縣 尹守正

 

 

 

송나라 때의 유학자로 주자학(朱子學)을 세운 회암(晦庵) 주희(朱熹:1130-1200) 의 시(詩)

주부자 군자정시(朱夫子君子亭詩)로,

倚杖臨寒水(의장임한수)   지팡이 의지한 채 한수에 임하여

披襟立晩風(피금립만풍)   옷깃 헤치며 해질녘 바람에 섰네

相逢數君子(상봉수군자)   서로 만난 여러 군자들

爲我說濂翁(위아설염옹)   나를 위해 염옹을 설명하네

이 시에서 주자가 말하는 염옹은 송나라 때 염계(濂溪) 주돈이를 말하며,

염계는 진흙에서 자라도 더럽혀지지 않는 연(蓮)이야말로 군자의 기상과 닮았다고 읊은 애련설(愛蓮說)을 지었는데,

주자는 주렴계를 기려 군자정이라 이름하였고, 전세걸(全世杰)은 정여창(鄭汝昌)를 기려 군자정이라 한 것입니다.

 

 

 

군자정(君子亭)에는 2개의 군자정중수기가 있어,

한문의 군자정중수기(君子亭重修記)와 한글이 혼용된 근자에 올린것으로 보이는 군자정중수기(君子亭重修記)가 있으며,

 

 

 

군자정기(君子亭記)의 기문도 편액되어 있습니다.

 

 

 

군자정(君子亭)의 마루에서 계곡을 내려다 봅니다.

 

 

 

군자정(君子亭) 아래 계곡에는 집채만한 바위 등의 볼거리가 있으며,

바위에 올라 바라보는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고 하며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수량도 제법 많으며,

물이 어느 정도 빠지고 맑은 물이 흐를 때면 계곡에서 물놀이도 즐길수 있습니다.

 

 

 

소나무를 비롯한 노거수 나무들이 정자 주변에 둘러 있어,

화림동 계곡의 맑은물과 더불어 시원함을 즐길수 있을듯 합니다.

 

 

 

함성호 시인의 "건축가의 옛집읽기" 에서의 군자정(君子亭)에 관한 글을 가져와 봅니다.

군자정이 있는 봉전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처가가 있었던 곳이다.

일두는 처가에 들를 때마다 자주 이곳 영귀대에서 쉬곤 했는데 이를 기려 거연정을 지은 화림재 전시서의 후손들이

1802년 일두가 자주 쉬던 영귀대에 정자를 세웠다.

영귀대라는 큰 너럭바위가 이 건물의 주초가 되었다. 그래서 군자정에는 주초가 없이 누 아래 기둥들이 터벅터벅 바위 위에 발자국을 찍듯이 놓여 있다.

호쾌한 수법이다.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정자다.

솜씨가 빼어난 목수가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인데 특이하게 측면이 계곡 쪽을 향하고 있고, 진입도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두 칸의 측면에서 진입이 이루어지다 보니 자연히 계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서 현판도 치우쳐 있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목이 누구인지 신중한 설계를 했다.

계곡에 세워진 정자이니만큼 볼 게 많은 계곡 쪽으로 정면 세 칸을 마주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을 때 계곡과 등을 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같이 앉을 때는 건물의 길이 방향으로 서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계자는 이 불평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과감하게 측면 두 칸을 계곡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계곡에 등을 진 사람이 없이 모두 평등하게 계곡 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언제든지 산수를 감상하게끔 되었다.

따라서 누정에 오르는 진입도 계곡을 보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두 칸의 중심에 계단을 두면 반드시 기둥과 부딪히니 오른쪽 옆 칸의 중심으로 계단을 뺐다.

리고 그 위에 현판을 걸었는데 한 칸에 걸리는 현판답게 크기도 적당히 작다. 실로 빼어난 안목이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계획되었고, 어느 것 하나 명분에 치우쳐서 무리하게 둔 수가 없다.

누 아래와 누 위의 비례도 안정되고, 누 아래의 기둥도 투박하지만 튼실하다.

그 덕에 누 위에 있는 기둥은 바위 위에서 솟은 것 같아 보이고 그 위의 지붕은 홑처마임에도 활짝 편 우산처럼 날렵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군자정이 있는 봉전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처가가 있었던 곳이다.

일두는 처가에 들를 때마다 자주 이곳 영귀대에서 쉬곤 했는데 이를 기려

거연정을 지은 화림재 전시서의 후손들이 1802년 일두가 자주 쉬던 영귀대에 정자를 세웠다.

영귀대라는 큰 너럭바위가 이 건물의 주초가 되었다.

그래서 군자정에는 주초가 없이 누 아래 기둥들이 터벅터벅 바위 위에 발자국을 찍듯이 놓여 있다.

호쾌한 수법이다.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빼어난 정자다.

 

 

 

경남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의 8정(八亭) 정자중 하나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유허를 돌아볼수 있으며,

소박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아담한 정자 문화재인 함양의 "군자정(君子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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