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의 문화재 탐방에서,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2층 누각 안의광풍루(安義光風樓)를 찾았습니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광풍루(光風樓)는,

조선시대의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나 회의를 위해서 세운 2층 누각으로,

1412년(태종 12) 이안현감(利安縣監) 전우(全遇)가 지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고 하며,

그 뒤 1425년(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현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1494년(성종 25)에 현감 이었던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하여 이름도 광풍루(光風樓)로 고쳐 불렀습니다.

그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년(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진)이 복원하고,

3년 뒤인 1605년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였고 누각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단청을 새로하고 주변을 정화하였고 2014년 광풍루를 뒤쪽으로 10m정도 옮겨 옛 모습으로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풍루(光風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지붕건물의 누각으로,

기둥의 주춧돌은 둥글게 깎아 만들었고  지붕의 경사면에 처마를 하나 덧댄 팔작지붕을 연출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소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함양 읍내의 학사루와 유사한 건축 양식으로 금호강을 앞으로 하고 안의 읍내를 뒤로하면서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지었습니다.

 

 

 

함양 상림에 있는 학사루는 아래의 자료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http://gotn.tistory.com/543

 

 

 

광풍루(光風樓)로 오르기전 누각의 아랫부분을 돌아보고 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찾습니다.

 

 

 

앞서 광풍루(光風樓)는 함양 읍내에 있는 학사루와 유사한 건축형태라 전했는데,

함양 읍내 학사루의 계단은 막아두었지만 이곳 광풍루는 열려있어 마루로 오를수 있습니다.

 

 

 

마루에서 볼수있는 예서로 쓴 "광풍루(光風樓)" 현판으로,

숭정 삼 기해 삼월  일(崇禎三己亥 三月  日)이라 써있어,

숭정 삼 기해는 1779년(정조 3), 이운영(李運永)이 58세로 황간 현감때 쓴 글씨로,

아래의 낙관(落款)에서 "한산 이운영 건지 장(韓山 李運永 健之 章)"이라고 되어있어 글씨를 쓴 사람이 이운영(李運永) 임을 알수 있는데,

이운영(李運永, 1722∼1794)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용모가 특히 단정하고 평온한 인상을 풍겨 들판에 서 있는 인자한 노인처럼 보였다고 하며,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어 집에 식량이 떨어져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집안을 청소하면서 단정히 정좌해 책을 탐독하였다고 전하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 탁지문(度支門) 액자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마루위에는 광풍루중수기(光風樓重修記) 편액이 있고,

 

 

 

광풍루기(光風樓記)의 기문도 올려져 있어 누각의 역사를 살필수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광풍루기(光風樓記)"의 편액으로,

현판은 끝머리에 "숭정 전몽 적분약 맹추일(崇禎 旃蒙 赤奮若 孟秋日) 은진 송시열기(恩津 宋時烈記)"로 되어있는데,

고갑자(古甲子)에서 전몽(旃蒙)은 을(乙)의 뜻이고 적분약(赤奮若)은 축(丑)의 뜻이라 합하여 을축(乙丑)이니,

이 때는 숙종11년(1685)으로 송시열의 나이 79세 때 입니다.

 

 

 

광풍루(光風樓)는 조선시대 조정의 명에 따라 안의현감이 부임할 때 가장 먼저 맞아들인 장소였고,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는 중·고등학생들의 임시교실로 사용하는 등 깊은 역사를 지닌곳으로, 

 

 

 

광풍루는 단청공사를 새로 하여 그런지 오래된 목조건축에서 느껴지는 고졸한 옛 멋은 다소 덜 한편이며,

 

 

 

금호강(錦湖江)의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광풍루(光風樓)는,

비단처럼 아름다운 강이라 이름 붙였던 금호강(錦湖江)변에 자리 하였으나,

오늘날 강은 하천 개발로 그 모습을 잃어버렸고, 후면에 상가와 민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는 찾을수 없습니다. 

 

 

 

옛부터 안의현(安義縣)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과 주변지역이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지방행정 조직으로,

이 지역은 덕유산 남쪽의 여러 갈래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을 중심으로 마을이나 농경지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백두대간 주요 교통로인 육십령을 통해 전북 무안, 장수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누각의 마루에서 잠시 머물다 내려가는 길을 잡습니다.

 

 

 

광풍루의 누각 뒤편에는 비석이 있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5호로 지정된 "상무좌우사접장하경순포선불망비(商務左右社接長河璟詢褒善不忘碑)"로,

안의(安義)를 중심으로 한 상무좌우사(商務左右社)의 접장(接長) 하경순(河璟詢, 1875~1946)의 공적을 기려,

안의 상인들이 1911년에 세운 비석으로,

상무사(商務社)는 1899년(광무(光武) 3년)에 설립된 상업관장기관이며,

이보다 앞서 1883년(고종(高宗) 20)에 설립된 혜상공국(惠商公局)이 2년 뒤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되면서,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의 단체를 좌단(左團), 봇집장수인 보상(褓商)의 단체를 우단(右團)으로 불렀는데,

상무사(商務社)는 좌단을 좌사(左社), 우단을 우사(右社)로 고쳐 렀으며 지역경제사 연구의 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곁에는 "의병대장 문태서 기공비"가 있어,

문태서(文泰瑞, 1880~1913) 의병장은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이끄는 의병진에 참가하였으나 최익현이 피체당하게 되자 뒤를 도모하고 해산 하였다가,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군대를 해산하게 되자,

문태서는 다시 의병을 조직하여 덕유산을 근거로 부하 약 200명을 거느리고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며,

이후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진공작전 계획이 수립되자 함께 참여 하기도 하였고 진공이 중지된 이후 옥천군 이원역을 폭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을 수립하여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면서 의병 활동은 침체에 빠지게 되어,

문태서는 은거하며 집에서 지내던 중 왜국밀정의 계략에 체포되어 34세의 나이로 옥중순국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의 누각으로 금호천(錦湖川)의 강가에 우뚝 서있으며,

세월의 흐름과 개발의 여파로 옛 정취는 찾기 힘들지만,

조선시대 관아의 누각 면모를 살필수 있으며 용추계곡을 향하는 길목에 있어,

전통간장의 옛맛을 느낄수 있는 안의갈비와 함께 찾아 볼만한 곳으로,

경남 함양의 "안의광풍루(安義光風樓)"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