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를 다녀 오면서,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강원감영(江原監營)을 찾았습니다.

 

감영(監營)은 관찰사가 주재하며 정무를 보던 곳으로,

강원감영(江原監營)은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던 곳으로 사적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 명칭은 "원주 강원감영(原州江原監營)" 입니다.

 

 

 

강원감영(江原監營)으로 들어가기전 안내문에 있는 감영(監營)의 복원 배치도를 먼저 살펴보고 들어갑니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인 1395년(태조 4)에 원주에 설치 되었으며,

감영은 조선시대에 각도의 관찰사(觀察使:監司)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원주, 전주, 평양의 감영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감영은, 

한곳에 계속 있지 않고 소재지의 변천과 도시화 등으로 그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강원감영지에는 당시의 건물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인 선화당과 포정루, 청운당(내아)이 원위치에 남아 있고,

2000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중삼문지, 내삼문지, 공방고지, 책방고, 보도, 담장지, 행각지 등의 관련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지 등의 하층에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나라 관아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 입니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로는 원주는 한양에 있는 왕의 명령이 가장 신속하게 전달되고,

그 명령을 강원도 각 지방으로 가장 빠르게 전달 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조선시대 당시 원주지역은 강원도에서 인구수, 토지면적이 가장 크고 넓었기 때문에 강원도 곳곳에서 사람과 물자가 모이기 편리했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편해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역할로 강원도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기관을 뒷받침할 경제적 능력이 충분한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감영(監營)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포정루(布政樓)로,

선화당과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포정루(布政樓)의 현판이며..

 

 

 

포정루(布政樓)의 문루(門樓)는 방형의 긴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익공 양식에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이며 문루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고 궁창판에는 장식이 없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강원감영을 찾았을때는 문닫을 시간이 임박 했슴에도,

이곳을 관리 하시는분이 멀리서 찾으셨는데 천천이 여유있게 돌아보라는 배려가 있어 다행 였습니다.

 

 

 

포정루(布政樓)를 들어서면,

또다른 문인 중삼문(中三門)이 보이고,

 

 

 

포정루를 통과한 사람들에 대해 재차 신원과 방문목적을 확인하던 중삼문(中三門)이며,

 

 

 

중삼문(中三門)에는 "관동관찰사영문 (關東觀察使營門)"의 현판이 걸려 있어,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중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굽어지는길에 또다른 문과 선화당이 보이고,

 

 

 

중삼문(中三門)을 지나면 내삼문(內三門)이 있어,

내삼문은 진입공간에 가장 안쪽이고 방문자는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확인을 받게 되며

두개의 삼문은 담장없이 문만 서 있지만 옛날에는 경계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내삼문(內三門)은 현판은 징청문(澄淸門)으로,

"문을 들어서며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내삼문을 지나면 포정루(布政樓)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선화당(宣化堂)"이 있어,

선화당은 감영의 핵심건물로 관찰사의 집무처로 쓰였으며,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1395년(태조 4)에 처음 설치된 후 1895년(고종 32)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될 때까지 500년 동안 유지 되었으며,

옛 건물로는 문루와 선화당, 청운당만이 남아 있으며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와 연못터 등을 찾아냈습니다.

 

 

 

선화당 한쪽에는 죄인을 심문하거나 형벌을 내릴때 씌였던 도구들이 보이고,

원주 일대의 죄인들은 강원감영으로 이송되어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는데,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처형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화당(宣化堂)의 현판으로,

이곳과 연고가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의 글씨이며,

 

 

 

선화당(宣化堂) 또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문루와 함께 재건하였는데, 동헌 등 부속 건물이 있었으며,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정면과 양 측면의 각 1칸씩은 툇간으로 처리하였고 중앙부는 바닥을 올려 마루 널을 깔고,

왼쪽 3칸은 개방되어 있으나 오른쪽 2칸은 띠살창을 달아 방으로 구획하고 있으며,

 

 

 

선화당은 이익공 양식에 2고주 7량집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사면에 기둥들을 세워 1칸의 툇간을 두었고 기둥 옆에는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대에 변형이 있었으며,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짰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발굴 과정에 드러난 기단으로 인해 옛 관청의 위용 있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창구이자 각 도의 수장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감영이며,

오늘날의 도청을 연상하면 될듯한데 지금보다 훨씬 영역을 광활해서, 

8도에 한 곳씩 설치된 감영을 통해 어명이 전달되고 여러 고을에서 거둔 곡식과 진상품이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으니,

감영이 있는 곳은 작은 도성과 다름 없었습니다.

 

 

 

네 군데 처마 끝에 기와로 구운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 선화당은,

관찰사의 집무처로 쓰였으며,

포정루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는데,

문루인 포정루는 1660년(현종 1년)에 목사(牧使) 이후(李候)가 다시 건립하였고 6.25 전쟁 때도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구하였고,

선화당은 1667년에 다시 세워 졌습니다.

 

 

 

강원감영의 관아는 1795년(영조 35)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총 27동에 505칸의 건물이 있었으며,

1830년(순조 30)에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에는 41동의 건물이 나와 있는데,

원주목의 관아인 본관, 별창, 사창, 추월대 등을 제외하면 강원감영의 건물은 37동 였으며,

그 후 고종 때 관찰사 윤병정이 1874년부터 1875년 사이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당시 건물은 모두 43동에 495칸에 이르렀습니다.

 

 

 

선화당 다른쪽 옆에는 내아(內衙)인 청운당(靑雲堂)이 있어 , 

 

 

 

내아는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안채로 내사, 내옥으로 불리기도 하며,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자형 목조 기와집으로 후대인 19C경에 옮겨 지은 건물 입니다.

 

 

 

선화당 일원을 돌아보고 나오는길에,

관리사 앞쪽의 커다란 화분이 있어..

 

 

 

탐스런 연꽃이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듯,

화사하게 피어올라 방문객을 반겨주고 있습니다.

 

 

 

사료관 행각(行閣)의 모습으로,

강원감영사료관은 조선 시대 500년간(1395 - 1895, 태조 4년 - 고종 32년) 국가의 지방 통치 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으로,

출토유물과 감영의 옛 모습을 재현해 두었습니다.

 

 

 

포정루를 마주하고 맨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공방고지로,

강원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확인된 공방고지는 공방에서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보관했던 창고로 추정되며,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그리고 공방 등 6방 중 공방이 관리하던 창고인 공방고터 입니다.

 

 

 

문루인 포정루로 나오며 담 쪽으로 전정비 들이 줄지어 서있어,

14개의 비석으로 이 비석에는 과거 강원감영과 원주목에서 근무한 관찰사와 목사들이,

재임 당시 강원도와 원주지역을 선정으로 다스림에 대한 선정비이며,

 

 

 

강원감영에는 청백리 황희 정승이 세종 5년(1423)에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선화당에 머물렀고,

선조 13년(1580)에 관찰사로 임명된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은 자신의 임지인 강원도를 둘러보고 유명한 "관동별곡"을 지어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조 500여년을 한자리에서 유지한 감영으로, 

지금은 남아있는 건물 몇채로 만족해야 하지만,

발굴을 통하여 감영의 배치와 유물들이 출토되어 북원을 앞두고 있어,

빠른시일내에 선화당 뒷쪽의 연못과 건물등이 복원이 되어,

옛감영의 위상을 살필수 있게 되길 기대하며 "원주 강원감영(原州江原監營)"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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