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들이를 겸해서 장충단 공원의 수표교 찾았습니다.

장충단 공원은 구한말의 애환과 애국충정이 깃든 호국의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 공원은,

조선조 영조 때 어영청(御營廳)의 분영(分營)으로,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 이 있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수표교를 찾기위해 공원을 들어서면,

작은 정자 하나를 지나서 석등과 비석군이 눈에 들어옵니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맞았고,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에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장충단" 이라는 사당을 지었습니다.

 

 

 

 

그후, 사당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고 사라져 버렸으며,

1969년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습니다.

 

 

 

 

남산의 동쪽 종남산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 있고,

 

 

 

 

계곡의 기슭에 장충단공원이 있으며,

공원의 입구쪽에 자리해 있는 조선 전기의 다리 수표교(水標橋)입니다.

 

 

 

 

수표교는 원래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습니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보물 제838호)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길이 27m, 너비 7m크기의 다리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청계천에는 마전교(馬廛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1420년(세종 2년) 당시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 앞에 있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으로,

1441년(세종 23년) 들어 나라에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들자,

세종은 정확한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인 수표(水標)를 개발하고 마전교 서쪽 중앙에 세웠습니다.

수표는 하천이나 호수 등의 수위를 재는 측량 기구로,

청계천 마전교에 수표를 설치할 당시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소표로 수위를 측정하면서 부터 마전교는 수표교(水標橋)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표교 아래에서 다리의 상판을 살펴보고..

 

 

 

 

다리 위에서 보았을땐 돌로 꽉차있어,

틈이 없어보였는데 아래에서보면 돌틈이 조금씩 보이기도 합니다.

 

 

 

 

교각(橋脚)에도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으며,

1406년(태종 6)에 인공으로 물길을 뚫어 만든 개천 위에는 돌다리 7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표교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하여 수량(水量)을 재는 구실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입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 구조로,

하부의 구조는 두개의 석재를 엇갈리게 세워두어 불안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꼭 들어차있는 상판의 구조가 무게 하중을 내리고있어,

5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하천을 건너주는 역활을 하였으리라 봅니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친구조로,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형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습니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물의 흐름이 유연하도록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여둔게 특이합니다.

 

 

 

 

과거로 건널수있게 해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인 수표교는 또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는데..

 

 

조선조에 수표교를 건너던 숙종이,

여염집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장옥정(훗날 희빈 장씨)을 발견합니다.

한눈에 미인임을 알아볼 정도로 눈부신 외모로,

파유용색(頗有容色), 즉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라는 기록은 실록에서도 이례적인 표현입니다.

 

 

장옥정은 중인인 역관 집안의 서녀(庶女)였는데,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역관의 우두머리로서 1677년(숙종 3년)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으며,

장옥정은 요즘으로 치면 미모의 재벌가 따님이었던 셈입니다.

그 여인은 단숨에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바로 궁으로 들어와 아들을 낳는데,

이로서 기사환국등 정국을 뒤흔든 희대의 요부로 궁녀에서 후궁으로,

중전의 자리에까지오르는 기록에 남은 희빈장씨 장옥정의 이야기가 시작된곳 입니다.

 

 

 

 

 

드라마 등으로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숙종과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첫만남이 시작된..

수위를 재었던 다리 "수표교"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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