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淸風文化財團地)를 돌아보면서,

조선전기 누각인 응청각(凝淸閣)과,

조선시대 익랑이 딸려 있는 대표적인 3대 누각중 하나인 한벽루(寒碧樓)를 찾았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 내에서 나란히 서있는 한벽루(寒碧樓)와 응청각(凝淸閣)으로,

 

 

 

청풍호가 내려다 보이는 풍광 좋은곳에 이건하여 자리해 있습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조선전기의 누각 "제천 청풍 응청각(堤川 淸風 凝淸閣)"을 먼저 찾아 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목조기와 팔작지붕건물로 한벽루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한 구조인 조선시대 청풍현 관아건물의 하나로,

원래 청풍현 객사 누각인 한벽루 옆에 나란히 세워졌던 2층 누각 였으며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며,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 (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때 "응청각(凝淸閣)"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며,

인조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으며 고종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 하였습니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 하였습니다.

 

 

 

2층 어칸 처마 밑에서 "응청각(凝淸閣)"의 현판을 볼수 있으며,

 

 

 

누각은 낮은 1단의 석축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세운 2층누각 건축물인데,

하층은 원주(圓柱)로 하고 상층의 후면칸은 방형주를, 전면칸은 원주를 세웠으며 하층은 기둥 사이에 토벽(土壁)을 쳐서 창고 등으로 사용한 듯하며,

공포양식(栱包樣式)은 익공계(翼工系)이며, 가구형식(架構形式)은 1고주(高柱) 5량(樑)으로 되어 있는 홑처마 백골집으로,

백골집(白骨家)이란 단청이나 다른 칠을 하지 아니하고 목재면을 그대로 둔 집을 의미 합니다.

정면 7.38m, 측면 3.95m의 "一"자형의 건물로 상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欄干)을 둘렀으며,

동남측으로 3단의 목조계단을 두었고 전면의 칸 사이는 등간격이나 측면의 전면칸은 후면칸의 2분의 1 규모 입니다.

 

 

 

응청각(凝淸閣)의 상층은 4면에 난간을 둘렀으며 동쪽 1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고 공포는 초익공 형식이며,

가구 형식은 1고주 5량가의 건물로 옛 청풍부(淸風府)의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당시 청풍부에는 객사(客舍) 55칸, 아사(衙舍) 37칸과 기타의 부속 채가 있었으며,

아사 37칸 중에는 치소인 관수당(觀水堂)을 비롯하여 한벽루, 응청각, 명월정, 범영루가 있었고 객관의 서헌(西軒)인 매월헌 등이 있었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응청각은 한벽루 서쪽에 있으며 한벽루처럼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응청각은 한벽루 서측에 위치한 조선 시대 청풍현 관아 건물의 하나로서 건물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방관과 고을의 세력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민중들의 삶을 보듬는 정담을 나누던 장소로 여겨지며,

관아의 누각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서 소박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누각입니다.

 

 

 

응청각 옆에는 대한민국의 보물 제528호로 지정된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가 있어,

 

 

 

1317년(고려 충숙왕 4)  청풍현 출신의 승려인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자 청풍현을 군으로 승격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지었다고 전하며,

그 뒤 1397년(태조 6)에 청풍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수리하였으며 전하는 중수기에는 "숭정갑술군수권경개창(崇禎甲戌郡守權璥改刱)"이라고 하여,

1634년(인조 12)에 권경이 다시 건립 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모습에는 이 때의 양식이 대체로 남아 있는데,

1870년(고종 7)과 1900년에도 수리하였고 1972년에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에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청풍부사를 지낸 문신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쓴 한벽루(寒碧樓) 현판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한벽루(寒碧樓)의 현판도 볼수 있습니다.

 

 

 

건물은 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있으며,

기단 위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덤벙주초(柱礎)로 놓고 가운데부분이 약간 부른 배흘림의 둥근 기둥을 1층과 2층에 각각 세웠습니다.

 

 

 

한벽루(寒碧樓)에 오르려면 익랑을 통해서 마루에 오를수 있는데,

익랑으로 오르는 돌과 나무로 구성된 낮은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을 오르면 익랑이 보이고 익랑을 지나면 단을 높여 한벽루의 마루에 이르게 됩니다.

 

 

 

한벽루(寒碧樓)는 1317년(고려 충숙왕4년)에 청풍현이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로,

석축토단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으로,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 (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습니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올린 주심포(柱心包)인데,

 

 

 

쇠서(牛舌)는 뾰족하고 그 아래 받침인 초가지에는 연꽃 봉오리가 조각되어 있는 등 장식적 표현이 더해져 있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었고, 마루바닥의 사방에는 닭의 다리 모양을 닮은 계자난간(鷄子欄干)이 둘러져 있습니다.

 

 

 

한벽루의 기문인 한벽루기(寒碧樓記)의 편액을 볼수있고,

 

 

 

누각의 마루에서 청풍문화재단지의 입구쪽 모습으로,

옛 청풍관아의 문루였던 금남루 지붕의 모습이 살짝 보이고,

 

 

 

한벽루(寒碧樓)에는 송처관(宋處寬)의 기문을 비롯하여,

송시열의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액자(額字), 청풍부사 박필문(朴弼文)의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 8분액자(八分額字),

청풍부사 김수증(金壽增)의 제일강산(第一江山) 4자의 편액, 미지수서(未知誰書) 만고청풍한벽루(萬古淸風寒碧),

청풍부사 김도근(金度根) 한벽루(寒碧樓) 대액자, 김정희의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편액등,

많은 기문과 현판들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모두 유실 되었다고 합니다.

 

 

 

옛 한벽루(寒碧樓)의 정취는 알수 없으나,

청풍호를 내려다보는 시원한 풍광은 지금의 한벽루 정취도 일품입니다.

 

 

 

한벽루(寒碧樓)는 다락집 형태의 익랑을 부설한 것이 특이한데 일종의 복도와 같은 형상으로,

사다리를 타고 익랑에 오른 다음 익랑을 거쳐 한벽루로 가도록 되어 있으며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조선시대 익랑이 딸려 있는 대표적인 3대 누각으로 밀양 영남루와 남원 광한루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었습니다.

 

 

안내문에서 볼수있는 한벽루(寒碧樓)의 옛 모습으로,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다락의 마루를 결구한 뒤 주위에 계자난간을 돌렸으며,

그 위에 사각형 기둥을 얹고 다시 그 위에 8각기둥을 세워 상부를 가구했으며,

공포는 익공계이면서도 주심포가 절충되어 있기 때문에 장화반 대신에 따로 만든 화반을 설치했습니다.

 

 

 

한벽루(寒碧樓)에서 올려다 보이는 모습으로,

청풍문화재단지(淸風文化財團地)에서 가장 높은곳에 있는 전망대도 한눈에 들어 옵니다.

 

 

 

충북 제천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청풍문화재단지(淸風文化財團地)에서 만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조선전기 누각 "제천 청풍 응청각(堤川 淸風 凝淸閣)"과,

대한민국의 보물 제528호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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