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을 여행 하면서,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였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18년간 은거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곳 "악양정(岳陽亭)"을 찾았습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악양정(岳陽亭)"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악양정(岳陽亭)의 구조는,

악양정(岳陽亭)과 덕은사(德隱祠)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되어있어,

 

 

 

문을 들어서면 악양정(岳陽亭)의 모습이 들어오고,

 

 

 

악양정(岳陽亭)은 정면 4칸, 측면 2.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2칸이 대청이며 양쪽으로 1칸씩의 방을 두었으며 가구는 5량 구조이며,

대청에서 출입하는 각 방의 문은 동쪽의 우측방은 3짝 분합문, 서쪽의 좌측방은 4짝 분합문이며,

중앙에 이자살 불발기창을 두고 다시 후면에 외여닫이문을 두어 치장 하였습니다.

 

 

 

악양정(岳陽亭)의 현판으로,

고종 때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한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4칸의 전면은 모두 쪽마루를 두었으며,

 

 

 

가운데의 마루방은 넌출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두었고,

 

 

 

양쪽 바깥쪽으로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입니다.

 

 

 

마루방에는 악양정(岳陽亭)의 유서를 알수있는 편액들이 있으리라 짐작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대문에 있는 관리인 연락처로 연락해 보았지만 멀리 있어서 열어주기 힘들다고 하니 아쉬움이 있습니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했고,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연산군의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지내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습니다.

 

 

 

사후 1517년(중종 12) 우의정에 추증되고, 1575년(선조 8) 문헌공(文獻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고,

나주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 남계서원(藍溪書院),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입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 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습니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은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 했습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곳과 관련한 유호인(兪好仁,1445~1494)의 칠언 율시"악양정(岳陽亭)"이,

정여창(鄭汝昌)의 "일두집(一蠹集)" 권3의 시장(詩章)에 수록 되어있어 가져와 봅니다.

一掬歸心天盡頭(일국귀심천진두) 하늘 끝 맞닿은 곳으로 돌아가고픈 한 줌 마음

岳陽無處不淸幽(악양무처불청유) 악양은 한 곳도 맑고 그윽하지 않은 데 없다지

雲泉歷歷偏供興(운천력력편공흥) 운무에 덮인 산수 깨끗하여 자꾸 흥을 돋우건만

軒冕悠悠惹起愁(헌면유유야기수) 벼슬길에 있다 보니 근심만 꾸역꾸역 일어나네

杜曲林塘春日暖(두곡림당춘일난) 두씨 살던 종남산 숲 속 연못 봄날이 따뜻했고

輞川烟雨暮山浮(망천연우모산부) 왕씨 망천은 안개비 속에 저무는 산이 솟았네

書筵每被催三接(서연매피최삼접) 서연에서 하루에 세 번 만나길 매번 재촉하니

辜負亭前月滿舟(고부정전월만주) 뜻이 어긋나 악양정 앞엔 달빛만 빈 배에 가득

 

 

 

악양정 뒤편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덕은사(德隱祠)가 있어,

 

 

 

덕은사(德隱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으로 맞배지붕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덕은사(德隱祠)의 현판으로,

글씨는 악양정 현판과 비슷해 보이는데 글씨가 지워져 알수 없습니다.

 

 

 

사당인 덕은사(德隱祠)에는,

주희(朱熹,1130~1200),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 돈재(遯齋) 정여해(鄭汝諧) 등 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 석채례(釋菜禮)를 행한다고 합니다.

 

 

 

악양정은 조선 전기 정여창(鄭汝昌)이 건립하여 강학 하던곳으로,

무오사화 이후 관리되지 못하다가 1899년(고종 36) 3월 향내 유림의 발의에 의해 군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1901년(고종 38)에 3칸의 정각을 중건 하였고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으며,

1994~1995년에 악양정(岳陽亭)을 비롯한 주변 일대를 보수, 정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02년 조선 말의 학자 송병순(宋秉珣)이 악양정(岳陽亭)에서 정여창(鄭汝昌)을 기리며 읊은 한시,

"악양정 근차일두선생운(岳陽亭謹次一蠹先生韻)"를 가져와 봅니다.

水闊山雄激懦柔(수활산웅격나유) 물 넓고 산 높아 나약한 마음 일으키는데

先生風韻想千秋(선생풍운상천추) 선생의 풍운 천년 뒤에도 상상할 수 있네

衣冠新葺羹墻地(의관신즙갱장지) 의관을 입고 흠모하는 곳 새로 엮으니

可覩南州善俗流(가도남주선속류) 남쪽 고을의 좋은 풍속을 볼 수 있구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머물면서 성리학과 오경(五經)을 연구하던 역사적인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정여창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01년에 중건된 것이지만,

정여창(鄭汝昌)의 사상과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남 하동의 "악양정(岳陽亭)" 방문기 입니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815

관리 하시는분 연락처: 010 2883 2312 (사전에 연락하시면 문을 열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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