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를 여행 하면서,

되돌아 오는길에 하동의 칠불사(七佛寺)를 찾았습니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쌍계사 북쪽 20리 되는 곳인 지리산 토끼봉(1533m) 아래 80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 칠불사(七佛寺)로,

 

 

 

1980년대 후반 불교에 심취하셨던 어머님과 함께 찾은적이 있었던 곳으로,

그당시에는 칠불사(七佛寺)가 아닌 칠불암(七佛庵)의 명칭였고,

비포장의 험한 산길을 한참 돌아올라 왔었고 작은 암자만 있었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너른 포장길에 이제는 암자에서 사찰로 변모하였나 봅니다.

 

 

 

산사로 오르는길을 즐기기위해,

멀지 않은길이라 산문앞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올라봅니다.

 

 

 

경내로 들어가기전 둥근 연못인 영지(影池)를 볼수 있어,

 

 

 

영지(影池)에대한 안내문이 기왓장에 써두어 특이한데,

 

 

 

영지(影池)는 허왕후가 7왕자의 성불한 모습을 보았다는 연못으로,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 갔으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게되어,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 칠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려왔고,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 하였습니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라.”고 하여 허왕후가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아들들의 모습은은 볼수 없었는데,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 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성불한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이 연못을 그 뒤로 영지(影池)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지의 오른편 윗쪽에는 아치형의 나무다리 건너에 아담한 팔각정자와,

공사중인 한옥건물이 들어오고..

 

 

 

윗쪽 길 건너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과,

윗쪽에는 부도전이 있어 올라 봅니다.

 

 

 

부도전에는 17세기 말 화엄학과 정토신앙의 발전에 기여한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의 부도와 함께,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부도등 3기의 부도를 볼수 있고,

 

 

 

그리 많이 알려진 사찰이 아님에도,

휴일을 맞아 밚은 이들이 칠불사(七佛寺)를 찾은 모습이고,

 

 

 

경내로 들어가는 옆쪽에도 연못이 있어,

사각의 연못에 둥근 섬을 볼수있는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은 유교적 우주론의 반영으로,

천원지방 (天圓地方)은 옛부터 우리를 지배했던 사상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유적지에서 볼수있는 연못입니다.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에서,

옛날과 많이 발전된 모습으로 변해있슴에 놀라게 되며 계단을 따라 올라 봅니다.

 

 

 

보설루 아래를 통하면 대웅전(大雄殿)의 모습이 들어오고,

 

 

 

누각옆 오른쪽에 범종각(梵鐘樓)이 있어,

칠불사에는 범종각이 아닌 "원음각(圓音閣)"으로 현판 되어 있으며,

 

 

 

범종(梵鍾은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여 깨달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종각 옆에는 수석들을 놓아 두어,

이곳 스님의 또다른 취향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칠불사(七佛寺)는 대한불교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로,

칠불선원(七佛禪院) 또는 칠불사라고도 하며,

연담(蓮潭) 유일(1720-1799)이 쓴 칠불암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玉浮仙人)이 부는 옥피리(玉笛) 소리를 들은 일곱 왕자가 입산하여 6년만에 도를 깨닫고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며,

그러나 세전(世傳)에는 옥보선사(玉寶禪師)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행하여,

6년만인 103년(파사왕 24)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七佛庵)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진응(震應)의 "지리산지"에 의하면 지리산은 칠불조사(七佛祖師)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하였다고 하고 있어,

이 중 가락국 7왕자의 성불 및 창건설이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여의 팔작지붕의 겹처마 구조이며,

 

 

 

중앙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상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아자방(亞字房)이 있어,

지금은 공사중여서 아쉽게도 들여다 보질 못하여 아래의 사진자료 2장을 가져와 봅니다.

 

 

 

신라 효공왕(재위 897∼912)때 김해에서 온 담공화상(曇空和尙)가 지었다는 칠불사아자방지(七佛寺亞字房址)의 2중 온돌이 복원되어 있어,

선원은 "亞"자형의 온돌방으로서,

아자방(亞字房)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曇空和尙)이 아자형으로 축조하여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지만 한번 불을 때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하며,

이곳의 신비(神秘)를 더해 주는 이야기는 많이 전해오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 방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비를 캐기 위해 한 스님이 굴뚝을 뚫었다가 가산(家産)을 탕진하고도 못 고쳤다는 것과,

구들장 하나를 들어냈다가 덮었으나 그 자리만은 다시는 더워지지 않았다는 것 등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자방은 길이가 약 8m이고,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곳이며 중앙의 낮은 곳은 불경을 읽는 곳으로,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이 온돌은 만든 이래 1000년을 지내는 동안 한번도 고친 일이 없다고 하는데,

불만 넣으면 상하온돌과 벽면까지 한달 동안이나 따뜻하다고 전하며 100년마다 한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한번 불을 때면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세 개의 아궁이에 넣어 한꺼번에 땐다고 하며,

화도(火道)가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 하였다고 하며,

1948년에 소실된 뒤 그 터만 함석으로 덮어 보호해 오다가 33년 만인 1982년에 복원 하였습니다.

 

 

 

창건 이후 칠불사(七佛寺)는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어,

1568년(선조 1)에는 부휴(浮休)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에는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각각 중창하였으며,

1907년에는 토비의 난으로 승려들이 흩어졌다가 1910년에 다시 선사(禪社)를 크게 열었고 이때 서기룡(徐起龍)은 이 절의 당우를 수리하였으나,

1948년 여순반란군토벌 때 불에 타버려 그 뒤 수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년에 문수전(文殊殿), 보광전(普光殿), 선원(禪院) 등의 건물을 중창 하였습니다.

 

 

 

대웅전 옆에는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모신 문수전(文殊殿)이 있어,

7왕자의 성불과 깊은 연이 있어 칠불사가 문수신앙 도량임을 잘 나타내주는 전각이며,

 

 

 

이곳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어,

어사(御使)로 내려온 박문수(朴文秀)는 화개동천(花開洞天)의 1백여 사암(寺庵)을 폐사(廢寺)할 구실을 찾으려고,

칠불암(七佛庵)을 찾았다가 어린 동승(童僧)에게 법문(法文)만 잔뜩 듣고 내려왔고,

그리하여 그 닷새 뒤 박어사(朴御使)는 하동현감(河東縣監)과 함께 스님들의 신통력을 시험할 한 가지 계책을 짜 내었습니다.

 “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달리게 하여  못 달리면 절을 폐쇄하고 달리면 선량(禪糧)을 부담한다.”는 것 이었으며,

 하동현감(河東縣監)의 통보를 받은 스님들은 산중회의(山中會議)를 소집했으나 묘책(妙策)을 찾지 못한 채 좌선(坐禪)으로 문수기도(文殊祈禱)만 올렸고,

마침내 시험 날짜가 되어 현청의 넓은 뜰에 박어사(朴御使)와 현감(縣監), 육방권속과 화개동천(花開洞天) 스님들이 모였는데,

 그때 칠불암(七佛庵) 스님 가운데 동승(童僧) 한 명이 나서 현감(縣監)에게 합장하고,

“소승이 작은 재주를 보여드릴까 하오니 대감께서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마시오.”하고 말하였고,

동승(童僧)은 다시 박어사(朴御使)에게  "이 목마(木馬)를 타고 허공을 날면 무슨 상을 주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마.”

이에 동자승은 “이후로는 불법(佛法)을 진실로 믿는 불자(佛子)가 되시오.” 하고 말한뒤, 

동승(童僧)은 목마(木馬)에 올라타 “자, 어서 달려라”하고 말하자,

목마(木馬)는 현청의 뜰을 열 바퀴 돈 뒤에 하늘로 둥둥 떠올라 북쪽으로 사라졌다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의 이야기 입니다.

 

 

 

또한 신라의 옥보고(玉寶高)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하여,

칠불사(七佛寺)가 신라 음악의 중요한 요람지 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의 기록에 따르면 불교(佛敎)가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중국(中國)에서 전파되었다는,

종래의 사실보다 약 270년이나 앞서서 가락국(駕洛國) 때 인도(印度)에서 바다로 전래되었다는 남방 전래설(南方 傳來說)을 추측케 하는데,

이와 유사한 사례는 전남(全南) 해남(海南) 미황사(美黃寺)의 창건 설화(創建 說話)에서도 발견되지만,

아직까지 이 기록을 뒷받침 해줄만한 사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정설(定說)로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나,

가락국(駕洛國)이 인도 방언(印度 方言)의 가라(伽羅), 가야(伽倻), 아라 등과 유사하며,

"가야(伽倻)"라는 말이 세존(世尊)이 성불(成佛)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가다(摩迦陀 : Magadha) 왕국(王國)에 있는 지명(地名)과 같다는 점에서,

이런 추측이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주 오랫만에 다시 찾아 사찰로 번성한 모습에 놀랐고,

불교의 남방 전래설(南方 傳來說)과 칠불사아자방지(七佛寺亞字房址),

옥보고(玉寶高)와 문수동자(文殊童子)의 이야기등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곳,

경남 하동의 칠불사(七佛寺)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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