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의 시립 박물관인,

양주 회암사지 박물관(楊州 檜巖寺址 博物館)을 찾았습니다.

 

2012년 10월 회암사지(檜巖寺址) 터 앞쪽에 세워진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으로,

회암사지 터에서 출토 된 유물들을 보관, 연구하며 전시를 통해 다음세대에 교육하고자 건립한 역사유물 박물관입니다.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은 유료이며 주차는 무료이고,

*이용시간 09:00~18:00 (11월~2월 ~17:00) 입장마감은 1시간 전

*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시장이 지정하는 지정휴관일

*이용요금 : 어른 2,000원 / 청소년 및 군인 1,500원 / 초등학생 1,000원 / 유아 및 노인 무료

*위치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1 (율정동) 

*문의/안내 회암사지박물관 031-8082-4187

 

 

 

박물관을 들어서면 회암사지 출토유물인 "백자동자상"이 맞아 주고,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였던 회암사(檜巖寺)와 관련한 출토유물과 기록,

모형 및 영상을 통해 회암사의 역사와 왕실과의 관계, 대가람의 위상을 관람할 수 있는 제1상설 전시실로 들어섭니다.

 

 

 

전시실 입구에서 볼수있는 법당의 연화 문양으로,

화려하고 장엄했던 회암사(檜巖寺)를 미리 보여 주는듯 하고,

 

 

 

회암사(檜巖寺)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誌公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우왕 2년(1376) 지공(誌公)의 제자인 나옹(懶翁,1320~1376)이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삼창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였으며,

특히,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이곳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成宗) 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1440~1504)를 시켜 중창 시켰으나,

당시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儒生)의 상소가 있었고,

 


명종(明宗,1534~1567)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죽음으로,

보우대사(普愚大師)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점차 퇴락해지기 시작하여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회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설명하는 공간으로,

회암사의 불교문화와 생활, 건축문화를 살펴보면서 억불정책으로 사라진 회암사의 역사를 관람할수 있어,

 

 

 

회암사의 잡상(雜像)으로 회암사지 출토 잡상은 그 종류와 수량이 매우 많은데,

잡상은 궁궐과 같은 왕실의 건축물 등 이외에는 사용이 제한 되었는데 조선전기 회암사가 차지하는 높은 사격(寺格)을 알수 있으며,

 

 

 

명나라 자금성의 잡상을 예시로 회암사지 출토 잡상은 인물상(人物像), 반인반수상(半人半獸像), 동물상(動物像)의 3종류로 구분할 수 있으며,

우리가 보는 궁궐의 잡상은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회암사지의 잡상은 명대(明代) 궁궐에 표현된 잡상과 유사한 면이 많은 특징을 보입니다.

 

 

 

보광전 주변에서 출토된 "청동금탁"이며,

풍령(風鈴), 풍탁(風鐸), 첨마(檐馬) 라고도 하는 풍경으로 건물의 추녀 끝에 다는 경쇠의 한 종류로,

​금탁은 바람에 흔들려서 소리가 나는 몸체와 추녀에 메달게 하는 연결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134자의 명문을 통해 1394년(태조 3년)에 왕사묘엄존자,조선국왕,왕현비,세자 등 왕실 인물들과 발원 등의 내용을 알수 있습니다.

 

 

 

왕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행사로 조선왕실의 행렬 모습을 재현해 두었으며,

 

 

 

재현해둔 회암사(檜巖寺)의 모습으로,

번성기 때 회암사의 규모는 전각이 총 262간이었고, 암자도 17개나 되었으며 모셔진 불상도 15척짜리가 7구나 있었다고 하며,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 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에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뿐 아니라,

옛 회암사(檜巖寺)를 알기 쉽게 설명을 해두어,

 

 

 

서승당(西僧堂은 온돌시설을 갖추고 남북으로 길게 놓여진 장방형의 건물로,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며,

서승당(西僧堂) 건물 내부에는 특이한 구조의 구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닥보다 45cm가량 높게 설치된 "ㅌ"자 형의 침상식 구들로,

이곳의 온돌시설은 지면보다 높게 돌출된 구조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의 온돌로 하늘에서 보면 "ㅌ"자를 남북으로 마주보게 놓은 모양 이며,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런 유사한 구조의 온돌은 유일하게 지리산 칠불암의 "亞"자 방에서 발견된 바 있으며,

칠불암의 아자방은 '그 구조가 오묘하여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선방으로,

서승당 역시 한꺼번에 수십명의 인원이 누울 수 있는 구조로 승려들의 선방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서승당의 온돌시설은 칠불암과는 그 규모나 보존상태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양호 합니다.

 

 

 

계단을 통하여 다음 전시실로 이동합니다.

 

 

 

이번 전시실에는 불화 뿐만 아니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백토를 빚어 머리를 만들고 작은 점토덩어리를 붙이고 조각칼로 다듬어 이목구비를 수수하게 묘사한 "백자동자상"으로,

머리는 양갈래로 말아 올린 쌍계형이며 곁에 걸친 장옷은 발까지 드리우며 굵은 음각선으로 길게 늘어진 장옷의 주름을 묘사하고,

허리춤에 두른 띠도 그렸으며 뒷면에도 옷주름과 옷장식등을 음각기법으로 표현 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입니다.

 

 

 

"천순경진 명 봉황문(天順庚辰 銘 鳳凰紋) 수막새"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며,

천순경진’(天順庚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 시기가 1461년(세조 7)임을 알 수 있으며,

왕실의 문양으로만 사용되었던 봉황문(鳳凰紋)여서 당시 화엄사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제작하여 회암사에 봉안한 불화(佛畵)로,

화기의 발문(跋文)은 보우대사(普愚大師)가 썼으며 그림은 도화원(圖畵院) 소속의 화원(畵員)이 그렸습니다.

 

 

 

회암사지 박물관에는 양주를 소개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36.1㎝×23.6㎝의 크기인 "양주송추도(楊洲 松楸圖)"로 개인 소장품이며,

조선 후기 화가 정황이 북한산과 도봉산의 일부를 배경으로 양주에서 송추로 넘어가는 길목의 경관을 재현한 진경 산수화로,

정황(鄭榥)[1735~?]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하였던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손자이며,

산수, 인물 등을 잘 그렸다고 전해지며, 가업(家業)을 이어 진경 산수화를 자주 제작 하였으며,

조부인 정선 화법(畫法)의 영향으로 정선의 작품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화풍을 구사한 경우도 있으나,

양주송추도(楊洲 松楸圖)는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합니다.

 

 

 

양주의 옛이름인 양주목(楊州牧)과 관현한 유적들을 살필수 있어서,

 

 

 

"귀거정(歸去亭)" 현판으로,

귀거정은 조선 후기 문신인 안종해(1681~1754)가 청주목사 직에서 물러나 양주로 귀향하여 지은 정자로,

"귀거(歸去)"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같은 의미인 "귀래정(歸來亭)"은 우리나라 여러곳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6호 "양주농악(楊州農樂)"으로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농악놀이 이며, 

고종 광무 7년(1903년) 농업 장려책의 일환으로 마련된 농악대회에 참가한 양주의 두레패가 절기마다 농사짓는 과정을 율동과 춤으로 승화시켜,

우승기인 농기를 하사받으면서 널리 인정 받았던 농악 입니다.

 

 

 

"방상시(方相氏)"는 귀신을 쫓는 의식에 쓰이는 나자(儺者)의 하나로,

뾰족한 창과 방어능력이 탁월한 커다란 방패를 가졌으며 방상시의 험악한 모습은,

비정상적인 기괴한 표정을 드러내어 악귀를 쫓고자 하는 데서 비롯 되었으며,

중국에서 고대 주(周)나라 이래로 장례(葬禮) 풍습에서 악귀를 몰아내는 의미로 사용 되었으며,

우리나라 에서는 5, 6세기경 신라시대부터 장례와 구나의식(驅儺儀式)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장례 행렬의 맨앞에서 잡귀와 액을 쫓는 역활을 하며 상여를 장지(葬地)로 이끌어 주는 역활을 합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 별산대(楊州 別山臺)놀이 입니다.

서울·경기지방에서 이루어진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에 속하는 춤과 무언극, 덕담,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며,

대보름·삼짇날·초파일·단오·유두·백중·추석·단풍놀이 등의 여러 명절 때와 가뭄이 들 때 기우제(祈雨祭)로 연희 되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전시실 에서는 양주지역의 옛 생활도구들을 살펴볼수 있으며,

 

 

 

계단을 통하여 아랫층으로 내려 옵니다.

 

 

 

재현해둔 옛 회암사(檜巖寺)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 보고,

 

 

 

회암사(檜巖寺)와 깊은 인연이 있었던 청룡포를 입은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어진(御眞)으로 국보 제317호의 모사본으로,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소장품을 끝으로 회암사지 박물관을 나옵니다.

 

 

 

박물관을 나와 바로 윗쪽에 있는 회암사지(檜巖寺址)를 찾아 봅니다,

회암사는 대규모일 뿐만 아니라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 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 방식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기 최대 왕실 사찰이던 회암사 터에 세워진 양주시에서 건립한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터에서 출토 된 유물들을 알기쉽고 이해하기 쉽게 전시 해두어,

고려와 조선을 잇는 대규모의 사찰에 대해 알수 있었고 사라져 버린 사찰 회암사(檜巖寺)를 더듬어 볼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양주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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