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의 정자로,

이산정(泥山亭)과 자운정(紫雲亭)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강학공간과 정자인,

 이산정(泥山亭)과 자운정(紫雲亭)은 별도로 있는것이 아니고 하나의 담당안에 나란이 같이 있어,

 

 

 

대문을 들어서면 이산정(泥山亭)이 먼저 들어오고,

이산정(泥山亭)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강학공간으로,

1894년 후진을 양성하려고 세웠으나 1895년 을미사변이후 항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활용 하였고,

2012년 후손들이 중건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구조로,

2칸의 마루방과 1칸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19세기 후반의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이산정(泥山亭)의 현판이며,

이곳의 주인 김도화(金道和, 1825~1912)의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이곳 일직면 귀미리에서 태어 났으며,

25세인 1849년부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스승이 서거하자 서전(敍傳)을 짓고 기문록(記聞錄)을 작성 했고,

68세에는 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69세인 1893년 유일(遺逸)로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았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72세인 1896년에는 의병대장으로 추대 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는데 특히 이등박문에게 격고통감문(檄告統監文)을 보냈으며,

왕명으로 의병이 해산되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두문불출했으며 당시 영남유림의 태산북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문하에는 동산 유인식, 오헌 김홍락, 해창 송기식, 경암 백규,야산 정창조, 석암 홍의흠, 화남 김만조등을 비롯해 400여명의 학자를 배출 했으며,

척암 김도화(金道和)는 조선말 서산 김흥락과 함께 퇴계학통 적전 계승자로서 대표적 양대 맥을 이뤘습니다.

 

 

 

2칸 마루방의 전면은,

네 짝으로 된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접어 들어 올려 열수있게 해두었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2012년에 중건하여서 인지 옛스런 맛은 찾기 힘들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에 남긴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시(詩)를 가져 옵니다.

天地群陰日(천지군음일)       천지는 온통 음기로 가득한데

江湖一介臣(강호일개신)       강호에 살아남은 신하는

願埋雷首側(원매뇌수측)       원하노니 죽어서 수양산 기슭에 묻혀

歸拜舊君親(귀배구군친)       혼이라도 돌아가 예 임금과 친지를 뵙고자 하네

 

 

 

2012년 중건하면서 올린 이산정중건기(泥山亭重建記) 이며,

 

 

 


이산정기(泥山亭記)의 편액도 찾을수 있습니다.

 

 

 

마루에서 2칸의 방으로 들어가는 기둥 위에는 지지(止知)의 글이 보이고,

 

 

 

지지(止知)는 "알기를 그쳐야 하고"란 말 이지만,

 "知止而后 有定 定而后 能靜 靜而后 能安 安而后 能慮 慮而后 能得"

"그칠 데를 안 뒤에 정(定,안정됨)함이 있으니, 정(定)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흔들림이 없는 뒤에야)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안락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연구한) 뒤에 능히 얻는다" 라는 대학 우경 1장(大學 右經 1章)에서 인용한 글 입니다.

 

 

 

2칸의 방은 트여 있고,

방은 밝은 편이며 깨끗하게 정리 되어 있습니다.

 

 

 

마루로 나와 천정을 올려다 보니,

중건 하면서 목재의 교체가 많았슴이 보이고,

 

 

 

천정에는 옛 나무 아래에 상량의 글을 덧붙여 둔 모습이 들어 옵니다.

 

 

 

이산정(泥山亭)을 나와,

바로 위에 있는 자운정(紫雲亭)으로 오릅니다.

 

 

 

자운정(紫雲亭)은 1796년(정조 20) 대사헌 김굉(金宏, 1739~1816)이 독서를 위한 정자로 건립하였으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ㅡ"자형 건물로 5량가 박공지붕집 이며,

기단은 자연석 쌓기를 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柱礎)를 놓았으며 각주(角柱)를 세웠고,

전면의 한칸 반은 마루로, 남은 한칸반은 방으로 꾸린 특이한 구조이며, 

자운정은 비스듬한 지형에 지었기 때문에 앞부분의 기단은 55㎝의 높이 이나 뒷부분은 거의 지면과 동일합니다.

 

 

 

자운정(紫雲亭)의 현판이며,

 

 

 

전면의 1칸은 마루로 1칸을 반으로 나누어,

뒤쪽에 방을 들이고 앞은 마루를 놓아 "ㄴ"자형의 마루와 크고, 작은 2개의 방을 배치한 모습이며,

작은방에 들문을 설치하지 않은것도 특이하며..

 

 

 

마루의 옆면은 판벽을 두르고 나무 문을 달았으며,

 

 

 

마루의 뒷면도 판벽과 나무 문을 두었습니다.

 

 

 

마루에는 작은방의 문위에 단하나의 편액만 있어,

 

 

 

1979년에 쓴 "자운정이건기(紫雲亭移建記)로,

 

 

 

이산정과 자운정에는 기문 옆에 한글이 혼용된 설명을 해두어 알기쉽게 해두어,

자운정이건기의 내용에 의하면,

이산정과 자운정은 본래 다른곳에 있었으나 1979년 이곳으로 옮겨 왔슴을 설명 해주고 있어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자운정(紫雲亭)의 방은 문이 닫혀 있어 들여다 볼수 없었고,

 

 

 

자운정(紫雲亭)을 세운 김굉(金宏)은,

입향조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의 6세손으로 자는 자야(子野), 호는 귀와(龜窩)로,

177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77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되었고, 그 후 사헌부지평·단양군수·예조참판 등을 역임 하였으며,

1795년 김근의 옛 거주지에 생담정사(笙潭精舍)를 건립하여 문중의 강학지소로 사용 하였고,

같은해 1795년(정조 19)에 귀암정사(龜巖精舍)의 건립을 주도하여 완공 하였으며,

그는 정사나 정자 등의 건립을 통해 교육 활동에 전념 하였던 인물로 저서로 문집 6권이 남아 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맞배지붕의 간결 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 봅니다.

 

 

 

맞배지붕 정자의 옆면에서,

기둥과 벽, 그리고 작은 문을 통해 한옥의 아름다움을 찾게 됩니다.

 

 

 

조선제국 말기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고령을 돌보지 않았던 구국의 생과,

조선후기 정사(精舍)와 정자를 건립하며 후손들의 강학에 힘썼던 김굉(金宏)의 유허를 살필수 있었던,

경북 안동의 정자, 이산정(泥山亭)과 자운정(紫雲亭) 입니다.

 

김굉(金宏)의 귀암정사(龜巖精舍)와 생담정사(笙潭精舍)에 대한 내용은,

효와 후학의 정사(精舍), 안동의 생담정사 와 귀암정사_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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