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를 여행하면서,

경북의 오지 지역이면서도 정자와 고택의 무수히 많은곳이 봉화지역이며, 

봉화의 물야면 창마 전통마을에 있는 장암정(藏庵亭)을 찾았습니다.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150호로 지정된 장암정(藏庵亭)으로,

 

 

 

우리나라에는 장암정과 같은 이름의 정자는 제가 알기로 두어군데 더 있어,

이름이 나있는 전남 영암의 장암정(場岩亭)과 비지정 문화재인 영양의 장암정(章巖亭)있으나,

봉화 장암정(藏庵亭)까지 한글이름은 같으나 한문으로는 세곳 모두 다른이름 입니다.

 

 

 

일명 만축정(晩築亭)으로도 불리는 장암정(藏庵亭)으로,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1581~1637)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경종(景宗) 4년인 1724년에 풍산김씨문중(豊山金氏門中)에서  건립한 정자(亭子)로,

지방유생(地方儒生)들과 사림(士林)에서 모여 시사(時事)와 시론(詩論)을 하며 후학(後學)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 입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오량가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기둥 아래 기단을 한 층으로 낮게 하고 그 뒷부분 기단을 3층으로 높게 하여 앞쪽만 누 형식을 취하게 했으며,

정면 3칸 중 좌측 2칸에는 온돌방을 놓고, 우측의 1칸에는 마루를 두었으며,

 

 

 

정자 앞에는 물은 말라 있으나,

유교적 우주론의 반영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장방형의 연못이 있으며,

연목의 크기가 얼마 되지않아 섬은 없으나 옆에 나무를 심어둔 둥근 화단이 있어 천원(天圓)의 형태를 대신하는듯 하며,

 

 

 

장암정이 아닌 만축정(晩築亭)의 현판을 볼수 있으며,

 

 

 

2칸통 온돌방은 오른쪽 방이 왼쪽 방보다 조금 뒤로 물러나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방은 원래 방 가운데 벽을 치고 2짝 여닫이문을 달아 2칸으로 구분했던 방인 듯 하며,

온돌방 전면에는 크기를 달리한 툇마루를 두었는데 좌측 툇마루는 반 칸 남짓하고 우측 대청 쪽 툇마루는 1칸으로 넓은 편이고,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필요시 두 공간을 완전히 트이게 할 수 있는 들문인 사각형 정자살 불발기로 꾸민 맹장지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습니다.

 

 

 

대청쪽 사분합문(四分閤門)위에는 장암(藏庵)의 현판이 있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라고 하며,

 

 

 

기문(記文)으로는 광복후 첫 경신년  십대손 세락(世洛)이 쓴 "만축정중건기(晩築亭重建記)"와,

 

 

 

만축정상량문(晩築亭上樑文)의 편액만 있으며 시문(詩文) 등 다른 편액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자의 방은 두개의 방이 하나로 틔워둔 모습이며,

여름철에는 쉬는 공간으로도 쓰이는지 돗자리도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가까이는 연못과 노거수 벚나무가 있으며 멀리는 내성천 건너의 산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정자는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정면에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고,

기둥 상부는 주두를 얹고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 소로를 놓은 무익공계로 하고 가구는 5량가로 구성했으며,

대청 상부에는 팔작지붕의 가구재인 충량을 대량에 걸치지 않고 기둥 위의 대량 사이에 끼워 넣고 그 밑에 보아지를 받치고,

충량 상부에는 외기반자를 꾸몄습니다.

 

 

 

장암정(藏庵亭)의 주인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선조(宣祖) 38년(1605)에 25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 했으며,

1635년 조정에서 여씨향약을 실시할 때 도약정(都約正)으로 추대 되었고 그 해 청암도 찰방에 나갔으며,

인조(仁祖) 13년(1635)에 병자호란시(丙子胡亂時)시에는 안방준(安邦俊)이 의병(義兵)을 인솔(引率)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向)할 때,

봉미(俸米)를 내어 군량(軍糧)을 도왔으며 왕(王)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降服)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 시성(時聖)에게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서 살라고 이르고는,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는 장암집 (藏庵集)이 있습니다.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를 기리는 정자로,

시사(時事)와 시론(詩論)을 하며 후학(後學)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경북 봉화의 정자 문화재 "장암정(藏庵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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