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달성 태고정(達城太古亭)을 찾았습니다.

 

태고정(太古亭)은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함께있는 관리사부터 살펴보고,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의묘(節義廟)와 99칸 규모의 종택(宗宅)에 딸린 별당 건물이며,

태고정(太古亭)은 1479년(성종 10)에 박팽년의 후손으로 힘겹게 살아남은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며,

박팽년 후손은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가문으로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조선후기에는 관직에 진출 하기도 했습니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임진왜란 이후인 1614년에 다시 지어진 건물 이지만,

조선 전기 세웠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여 조선 전기 건축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막돌로 허튼층쌓기를 한 축대와 잘 다듬은 길고 넓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있는데,

정면 4칸 가운데 왼쪽 2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대청으로 평면 구성이 단순한 편으로,

왼쪽 끝에는 1칸의 온돌방이 있고, 그 뒤쪽에는 1칸의 부엌이 배치 되었으며,

온돌방의 오른쪽으로는 2칸의 또 다른 온돌방이 배치되었고 오른쪽 끝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4칸의 대청이 있습니다.

 

 

 

태고정(太古亭)의 현판이며,

 

 

 

일시루(一是樓)의 현판도 있으며,

 

 

 

마루 위에는 현판외에도 여러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의 편액들이 있으며,

 

 

 

태고정(太古亭)의 주인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으로,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47년(세종 29)에는 다시 중시에 합격 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며 한글 창제에도 크게 기여 하였으며,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으려 했으나 성삼문의 만류로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였고,

 

 

 

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형조참판이 되어 돌아온 뒤,

세조가 명나라 사신을 위해 마련한 연회 장소인 창덕궁에서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성삼문 등과 함께 혹독한 국문을 받게 되었고,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모의 사실을 숨기고 자신에게 귀부하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박팽년은 웃음을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으며 세조를 가리켜 "상감"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세조가 노하여 "네가 이미 신(臣)이라 칭 했으며 나의 녹을 먹었으니 지금 와서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묻자,

"나는 선왕(단종)의 신하로 충청감사가 되었으며 장계에도 신이라 한 적이 없고 녹도 먹은 바가 없다"고 말하여,

이에 세조가 장계를 살펴보니 신(臣)자가 아니라 모두 거(巨)자로 쓰여 있었으며 받은 녹도 모두 창고에 봉하여 두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조가 형을 가하기 전 김질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렀던 시조를 읊어 박팽년을 시험하게 하였으나,

박팽년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그의 굳은 절개를 나타내는 시조를 지어 응답 하였으며 이후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 하였습니다.

1691년(숙종 17) 복관 되었고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으며,

1791년(정조 13)에는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라 하였습니다.

 

 

 

건물의 가구(架構)는 5량(樑)이며,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서 기둥 머리에서 구름 모양으로 초새김(草刻)한 보아지를 내어 대들보 밑을 받치게 하였고,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를 대들보 위에 세워 종보(宗樑)를 받쳤으며,

온돌방쪽의 가운데 기둥 역시 배흘림이 있는 두리 기둥에 주두를 얹고 좌우 양쪽으로 첨차를 빼서 벽의 윗부분을 가로지른 대들보를 받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가구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강릉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고정(太古亭)의 규모는 아주 큰 규모의 정자는 아니지만,

조선 전기의 양식을 보여주며 가구와 세부 가공이 정교하고 초익공계의 정교한 구성이 특징 입니다.

 

 

 

순천박씨 세거지인 달성의 묘골마을에서 찾을수 있으며,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인 박팽년(朴彭年) 절의(節義)를 되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대구 달성의 보물 문화재 태고정(太古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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