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유적,

옛 이견대지(利見臺址)와 정자인 이견정(利見亭)을 찾았습니다.

 

사적 제159호로 지정된 경주 이견대(利見臺)로,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대본리 초등학교앞 언덕에 자리해 있으며,

 

 

 

이견대(利見臺)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681)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681년 그의 아들 제31대 신문왕(神文王,? ~692)이 세웠습니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대본리 방파제가 왼쪽으로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대왕암과 봉길리 해안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681년 신문왕이 세운 이견대(利見臺)는 없어 졌지만,

1970년 발굴 당시 건물 터를 확인했으며 1979년에 옛 이견대지(利見臺址)에 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利見亭)을 새로 지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신라의 건축양식을 참조하여 새로 지은 건물 입니다.

 

 

 

이견정(利見亭)의 현판으로,

이견(利見)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큰 덕을 갖춘 임금과 큰 덕을 갖춘 신하를 만나면 공을 이루게 되고 천하에 이롭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이견대(利見臺)는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곳으로,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용으로부터 받았다는 전설이 여기에서 비롯 되었고,

그 후 신라의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문무대왕릉을 참배 했습니다.

 

 

 

신라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고,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전하여,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고 하며,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으며,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고,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으니,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고,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 졌습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되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고,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 설화가 생겨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견정(利見亭)의 마루위에는 이견대(利見臺)를 찬한  여러기의 시문(詩文)이 있고,

 

 

 

기문(記文)으로는 1976년 김상기 찬(撰) 1990년 손돈호 서(書)의  이견대기(利見臺記)의 편액이 있습니다.

 

 

 

이견정(利見亭)의 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해바다로,

 

 

 

푸른 하늘아래 대왕암과 봉길리 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며,

 

 

 

이견정(利見亭)은 삼국통일을 이룬 통일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잘 보이는 인근 해변 언덕에 자리 잡은 정자로,

신문왕(神文王)이 대왕암을 바라보던 곳이기도 합니다.

 

 

 

문무왕(文武王,?~681)은 신라 제 30대 왕이자 무열왕의 장자로 이름은 법민이며,

왕위에 오른 후 재위 기간 동안 백제 저항군을 진압하고 고구려 정벌했으며,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는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으며 귀족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 했고,

외관을 감찰하기 위한 외사정을 두고 궁궐을 웅장하게 수리하는 등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신라 중기의 왕권 강화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681년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안 감포(甘浦) 앞바다에 해중왕릉(海中王陵)을 만들었습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이야기기 있으며,

화려한 능묘를 버리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의 의지를 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주를 여행하면 찾을만한 곳으로 이견대(利見臺)와 이견정(利見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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