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을 여행하면서,

우리에게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곽재우장군의 생가를 찾았습니다.

 

의병장 곽재우 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해 있으며,

주차장은 정비가 잘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생가(生家)로 향하는 입구를 들어서면,

곽재우(郭再祐) 의병장이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했다고 전해지는 현고수(懸鼓樹) 인근에 북을 매달아 놓은 누대가 있어,

곽재우(郭再祐)는 매부인 허언심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했다고 하며,

 

 

 

누대 옆에는 곽재우(郭再祐)의 동상이 있어,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의병장은,

1592년 4월(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이곳에서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동상 앞에는 곽재우(郭再祐) 유소명(有召命:임금께서 부르는 명령이 있슴)의 시(詩)가 있어, 

九載休糧絶鼎煙(구재휴량절정연)  구년 동안 양식이 없어 솥에 밥 짓는 연기 끊어지니

如何恩命降從天(여하은명강종천)  어찌하여 은혜로운 명령이 하늘로부터 내렸다 하는가.

安身恐負君臣義(안신공부군신의)  내 몸을 편안히 함은 군신의 의리 저버릴까 두려우니

濟世難爲羽化仙(제세난위우화선)  백성들을 구제함이 신선 되기보다 어려워라

 

 

 

동상 옆에는 군마의 조형물을 해두어,

말에 쉽게 오를수 있도록 발판을 해두어 말을 타고 추억을 남길수 있는 포토존이 있고,

 

 

 

생가 앞에는 수령 600년이 넘은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어,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간리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곽재우 생가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중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를,

조선시대 초기 건축양식으로 복원한 건물로,

 

 

 

복원된 생가는  안채, 사랑채, 별당, 대곡간채, 곡간채, 대문간채와 중문간채, 화장실, 우물, 그리고 장독대 등이 있어서,

대문채를 통하여 들어가게 되며.

 

 

 

곽재우 장군 생가 터에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등 7동의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춘 생가로 2005년 복원 하였습니다.

 

 

 

대문채는 밖에서 보다 안으로 들어오면 규모를 제대로 알수있어,

솟을 대문을 포함하여 8칸의 규모이며,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편에 사랑채가 자리해 있으며,

 

 

 

"ㄱ"자 형으로 되어있는 사랑채의 몸체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배치이며,

꺽여진 앞부분에는 난간대 없이 누마루 형식을 취했습니다.

 

 

 

사랑채에서 보이는 팔작지붕의 보와 우물천정의 모습으로,

복원한지 오래지 않아서 인지 고졸한 고풍의 멋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랑채의 후면을 돌아보고,

 

 

 

옆면의 담장을 따라 서있는 검정대나무인 오죽(烏竹)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중문채를 통하면 안채로 들어갈수 있어,

 

 

 

중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과 부속 건물을 거느린 안채가 들어오고,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곡간채가 2개가 있어,

 

 

 

각 각 대곡간채와 곡간채로 여겨지며,

 

 

 

안채는 정면6칸반 측면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안채로서는 큰 규모 입니다.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생애를 살펴보면,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으로,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 되었고,

그후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단기(單騎)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습니다.

 

 

 

1592년 5월 솥바위나루[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 창녕, 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 쳤습니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 하기도 했으며,

의병활동의 공으로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올랐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 했습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을 쌓았고,

1595년에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 왔으며,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고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 갔습니다.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올라 경주·울산의 전투경험이 많은 군사 2,000명을 수성군으로 삼고,

내륙에 있는 잡병 6,000명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건의 했으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갔는데,

이것을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만에 풀려나,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은거하면서 영산의 창암진(滄巖津)에 망우정(忘憂亭)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 갔습니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衛副護軍)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衛上護軍) 등에 임명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 하였으며,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졸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은 전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던 인물로 사후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의 사액이 내려 졌으며,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 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습니다.

 

 

 

뒷쪽에 있는 별당을 돌아 보는것으로 생가(生家)를 돌아보고 나옵니다.

 

 

 

생가(生家)에서 나와 곽재우(郭再祐)의 동상 앞에서,

눈을 감고 1592년 4월 이자리에 있었던 의병봉기의 현장을 상상해 봅니다.

 

 

 

임진왜란의 환란으로 의병봉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전란중 적을 맞아 싸웠던 이순신장군의 투옥과 절친했던 의병장 김덕령의 무고한 옥사(獄死)로,

관직에 미련을 두지않고 망우정(忘憂亭)에서 만년을 보냈던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생애를 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남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생가(生家) 방문기 입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또다른 이야기가 있는 정자 망우정(忘憂亭)은 아래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낙동강변의 정자, 창녕 망우정_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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