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를 여행하면서,

삼층석탑으로 유명한 감은사지(感恩寺址)를 찾았습니다.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이름난 경주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위치하며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어 용담이라 부르는데,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며,

 

 

 

감은사지는 약 40여년 전 어릴적에 우연히 처음 왔었는데,

당시에는 커다란 석탑이 있고 언덕아래 작은 연못이 있어 붕어가 많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옛날보다 연못이 커진 느낌입니다.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으로,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에 세워진 석탑이며,

 

 

 

먼저 동탑의 모습으로,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하는 것으로,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습니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감은사(感恩寺)은,

문무왕(文武王)이 삼국통일을 이룬 후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은사(感恩寺)는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사용했으며,

금당과 동서 회랑 사이에 익랑을 두어 이후 건립된 사천왕사 배치에 영향을 주었으며,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 였습니다.

 

 

 

삼층석탑은 화강암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方形) 중층(中層)의 탑으로,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이고 상층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 하였으며,

탱주는 하층기단에 3주,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고 초층옥신(初層屋身)은 각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습니다.

 

 

 

 

또한, 각 부의 구성이 백제시대의 초기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목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목조건축에 있어서의 구조성(構造性)을 잃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기단을 2단으로 한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이후 석탑의 시원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은,

1959년 12월 감은사지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장치(舍利裝置)는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었으며,

청동제 사리기와 사리기를 넣었던 청동제 사리외각함을 지칭 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 三層石塔)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 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흔적이 보이며 고선사지3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 합니다.

 

 

 

 

삼층 석탑 안쪽 중앙에는 금당(金堂)터가 있어,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로 고쳐 불렀다고 하며.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 되었고,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로우며,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 졌으며,

금당(金堂)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는데,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는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으로 여겨 집니다.

 

 

 

 

회랑은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어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며,

 

 

 

감은사지(感恩寺址)를 돌아 보고 나오는길에 안쪽에 있는 마주하고 서있는 노거수가 있어,

수령은 짧아 보이나 감은사(感恩寺)의 옛 역사를 들여 주는듯 합니다.

 

 

 

 

삼국통일후 동해바다를 지키려는 문무왕(文武王)의 염원이 담겨 있으며,

통일신라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이 되었던 삼층석탑(三層石塔)을 볼수 있는 곳으로,

경북 경주의 감은사지(感恩寺址)와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