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

봉화 쌍벽당(奉化雙碧堂)을 찾았습니다.

 

쌍벽당(雙碧堂)은 국가민속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산김씨(光山金氏) 종택(宗宅) 쌍벽당(雙碧堂)은,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별당인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金彦球)의 부친인 죽헌(竹軒)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다 하며,

1864년(고종 1)에 남익삼간(南翼三間)을 고쳤으며,

1892년(고종 29)에도 대대적인 중수를 가하고 외당인 별당채를 따로 지었다고 합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며,

마당이 나오고 안채에 달린 사랑채와 마주하게 됩니다.

 

 

 

솟을대문이 있는 바깥행랑채는 단간통(單間通)의 7칸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인 정침은 사랑채옆 중문을 통하여 출입을 하는데,

중문은 사랑을 드나드는 사람이 안채를 볼 수 없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ㅁ"자 형의 안채는 좌우에 날개채가 연결되어 있어,

 

 

 

안채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으며,

마침 외출을 하였는지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옆에 있는 고방의 살창으로 들여다 봅니다.

 

 

 

중문의 살창 사이로 보이는 대청의 모습으로,

안채의 대청은 일반 민간가옥에서는 보기 힘든 둥근기둥이 전면에 4개 후면에 4개 총 8개가 세워져 있는데,

그중 하나의 기둥이 눈에 들어 옵니다.

 

 

 

종택(宗宅)의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남익삼간(南翼三間)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사랑채는 중문채보다는 월등히 높게 지었고 지붕도 팔작기와지붕으로 독립 시켰고,

기단 위에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네모난 기둥을 세운 후 기둥 머리를 가구(架構)하는 기법을 쓰고 있으며,

 

 

 

사랑채의 규모는 동쪽으로 두 칸의 대청마루와 네 칸의 사랑방을 맹장지형 4분합문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으며,

대청마루의 동쪽면은 판벽으로 되어 있고 외닫이문은 넉살무늬창이 달린 넌출문으로 나무를 사용하여서인지 묵직하면서도 세심합니다.

 

 

 

사랑채에는 송죽헌(松竹軒)의 현판이 있어,

송죽헌은 입향조 김균(金筠)의 또다른 호인 죽헌(竹軒)에서 유래 하였으며,

 

 

 

하루(霞褸)의 현판도 올려져 있습니다.

 

 

 

사랑채보다 동쪽 뒤로 물러선 자리에 있는 쌍벽당(雙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팔작지붕 건물로,

8칸 넓이인데 그 중 왼쪽의 2칸만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깐 대청 입니다.

 

 

 

쌍벽당(雙碧堂)의 현판이며,

 

 

 

쌍벽당(雙碧堂)의 마루의 모습으로,

두꺼운 목재를 쓰면 상부 구조물이 묵직해져 둔한 느낌이 나는데,

이러한 묵직함은 춘양목의 아름다운 나이테 무늬와 조화롭게 섞이면서 독특한 멋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루 위에 있는 편액들을 살펴 봅니다.

 

 

 

쌍벽당(雙碧堂)의 마루에서는 1기의 시문(詩文)과,

쌍벽당중수기(雙碧堂重修記)를 비롯한 2기의 기문(記文) 등 4기의 편액이 올려져 있으며,

쌍벽당중수기에는 명종 21년(1566년)에 안채를 지었다는 것과 그 이후 이루어진 수리와 증축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2칸 크기의 방은 닫혀 있어 들여다 볼수는 없었지만,

마루쪽으로 나있는 문으로 장농에 가려 한쪽만 보이는 문이 특이해 눈길이 갑니다.

 

 

 

쌍벽당(雙碧堂)의 상부 구조를 보면  대들보 하나의 목재의 굵기가,

어지간한 한옥의 기둥보다 더 굵고 좋은 재목을 사용하였는데 춘양목으로 이름난 춘양이 가까운곳에 있어,

좋은 목재를 가까운 곳에서 가져다 쓸수 있었던 것도 지역적인 장점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마루에서는 사랑채 일부와 대문채가 들어오며,

쌍벽당(雙碧堂)의 당호로 표현되는 노거수 소나무의 모습도 보입니다.

 

 

 

종택(宗宅)의 가장 뒤편에는 방형의 담을 쌓아 사당을 배치 하였으며,

 

 

 

사당에는 현 종손의 4대 조상까지 열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입향조와 불천위 제사는 따로 대사당이라는 별묘에서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쌍벽당공파(雙碧堂公派)의 종택(宗宅)은,

남향한 양지바른 터에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며,

쌍벽당의 아버지인 죽헌공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는데,

원래 거촌은 양옆과 뒤가 산으로 막혀 있고 앞은 틔어 있는 소쿠리형으로 매우 아늑하고 산세가 좋은 곳이나,

뒷산이 낮아 다소 기가 약하고 근처에 물이 없다는 단점이 있어 풍수지리상으로는 물이 없으면 벼슬이 나지않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러 죽헌공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며,

과거는 대과를 치르지 말고 벼슬또한 하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20대(代)에 이르도록 지켜왔다는 자부심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당에서 나와 나오는길에 보이는 안채의 뒷벽에는,

처마 아래에 겨울살림인 시레기가 촘촘히 매달려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당파와 사화를 피해 낙향한 집안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벼슬이 나지않는 곳을 택해 터를 잡았으며,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자기수양과 후학 양성에만 힘 쏟았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쌍벽당공파(雙碧堂公派)의 종택(宗宅)으로,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북 봉화의 쌍벽당(雙碧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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