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을 여행하면서,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에 있는 "익산 함벽정(益山 涵碧亭)"을 찾았습니다.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익산 함벽정(益山 涵碧亭)은,

 

 

 

익산 여행의 명소인 "익산 보석박물관" 옆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 쉬우며,

주차장도 정비가 잘되어 있습니다.

 

 

 

익산 보석박물관 안쪽 주차장에서 차를두고 낮은 언덕을 들어서면,

높이를 달리하여 관리사와 화장실이 자리해 있으며,

 

 

 

정자로 오르기전에 이해를 돕기위해,

배치도로 함벽정(涵碧亭)의 위치와 주변 건물등을 살펴 봅니다.

 

 

 

함벽정으로 오르는 길에는 관리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함벽정(涵碧亭) 입구의 표석이 보이며,

 

 

 

입구의 왼쪽에는 竣功記念碑(준공기념비)를 비롯한 3기의 비석이 있어,

 

 

 

3기의 비석이 있어 내용을 추렴하면,

1930년 3월 27일 왕궁수리조합이 설립되었고 창립위원장에 조합장인 참봉 송병우와 송병태, 이학승 등이 창립위원평의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건립 연도는 추측컨대 일제시대에 사용한 연호가 기록되어 누군가에 의해 지운 흔적이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1927년인 소화2년으로 추정할수 있습니다.

 

 

 

비석 앞에서 오르던 길을 뒤돌아 보면 주차장과 보석박물관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함벽정(涵碧亭)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에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의 제방이 완성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고장의 대부호 였던 송병우(宋炳雨)가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기 위해 건립(建立) 누각으로,

일반 정자보다 월등히 크고 한쪽에 온돌방도 만들어져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게 했으며,

일제강점기 3.1운동이 일어난 기미년(1919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창고를 활짝 열고 기근을 해결하는 등 서민들의 아픔을 같이하고,

당시의 가장 큰 농사일에 걱정거리 였던 가뭄해결 위해 저수지 축조하고 그곳에 정자 세워 문인과 교류한 장소로 활용하는 등 큰 의미를 지닌 누정으로,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저수지 수문 옆 50여m 높이의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변에 벚꽃 나무를 심었으며,

주변 연못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하얀 연꽃을 심었다 하며,

푸른빛이 감도는 저수지의 맑은 물을 그려 함벽정(涵碧亭)이란 이름을 붙였고,

봄에 벚꽃이 반발하여 저수지 물에 비칠때 함벽정(涵碧亭)이란 정자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함벽정(涵碧亭)은 가공한 화강석을 외벌쌓기하여 기단을 조성하고 초석를 놓았는데 평면 바깥열의 초석과 내부열의 초석 모양이 다르며,

외진(外陣)은 사각형의 초석받침 위에 둥근 초석이며 내진(內陣)은 초석 받침 위에각형의 초석을 사용하여 그다지 높지 않게 누(樓)를 구성 하였으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계단 입구에는 잘 다듬어 세운 석주가 보이고,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두었으며,

마루는 하나로 트여 있지 않고 중앙에 또다른 마루방을 두었고,

 

 

 

초석과 같이 정자의 기둥도 외진(外陣)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내진(內陣)기둥은 사각기둥이며,

사각기둥에는 사분합의 문비(門扉)를 시설한 흔적이 남아 있어 외진과 내진이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내진부는 다시 1:2의 비율로 칸이 나뉘어 있습니다.

 

 

 

화려한 단청의 함벽정(涵碧亭) 마루에는 여러 편액이 올려져 있어,

 

 

 

함벽정(涵碧亭) 편액으로 벽운(璧芸) 유재호(劉載鎬)의 글씨이며,

유재호(劉載鎬 1870-1953)는 전라도 도사(都事 : 감찰관)를 역임해 유도사로 알려졌으며,

군산의 진남정(鎭南亭) 현판도 유재호(劉載鎬)의 글씨이며,

 

 

 

전서체로 쓴 "표정청경(瓢庭淸境)"의 편액으로,

표정청경(瓢庭淸境)은 "박을 기르는 정원"으로 맑은 곳의 의미하며,

전북 김제출신인 성리학자이자 명필로 풍미했던 취묵헌주인(醉墨軒主人)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祥 1891~1956)의 글씨 입니다.

 

 

 

함벽정(涵碧亭)에는 1937년 김녕한(金寗漢)이 쓴 함벽정기(涵碧亭記)의 기문(記文)과

시판(詩板)들이 편액되어 있으며,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넌출문을 접어 올려 두었는데,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모두 올려두면 관리에는 편하겠지만 

보기엔 두,세 방향 정도는 내려두었으면 정자의 정취가 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함벽정(涵碧亭)을 세운,

표정(瓢庭) 송병우(宋炳雨)의 사진을 가져와 봅니다.

 

 

 

표정(瓢庭) 송병우(宋炳雨)는 조선 말 종9품 참봉(參奉) 벼슬과 왕궁수리조합장을 지냈으며,

대지주(大地主) 였던 송병우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곡물을 풀어 기근에 허덕이는 민초를 보살폈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사재를 털어 왕궁초등학교, 삼기초등학교, 전주인후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땅도 희사 하였으며,

왕궁과 삼례를 잇는 도로를 처음 만드는 등 훌륭한 일을 많이 하였던 인물로 왕궁면 소재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왕궁초교에 있던 동상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무기재료로 가져가 없어 졌다고 합니다.

 

 

 

정자는 이익공계(二翼工系) 양식(樣式)의 팔작집으로 정각(亭閣)으로서는 큰 규모에 속하며,

기둥 위의 공포(공包)는 이익공계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평주(平柱) 위 공포의 쇠서(牛舌)가 전면(前面)으로만 돌출되는데 비해,

이 건물에서는 좌우 대각선(對角線) 방향으로도 돌출시켜 마치 귀기둥에서의 공포결구수법(공包結構手法)과 같이 짜여져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귀포(隅包 : 귓기둥 위에 짜놓은 공포)가 아닌 포작(包作: 공포를 짜서 꾸미는 일)에서대각선 방향의 쇠서(牛舌)가 짜여지는 사례는,

중국 건축의 공포에서나 볼수있는 예 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마루위 에서는 수려하게 단청되어 있는 그림의 모습을 볼수있어,

 

 

 

연화문, 동물문, 초화문 등 다양한 모습의 그림들을 찾을수 있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던,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憂國之士)이자 학자였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910)이,

"어느날 함벽정에서 밤에 연회를 베푸는 자리((涵碧亭夜讌)" 에서 1888년(고종25) 그의 나이 34세 때 지은 시가 매천집 1권에 전하고 있어,

함벽정은 송병우(宋炳雨)가 세우기 이전에도 자리하고 있었슴을 유추할수 있으며,

 

 

 

매천집에 있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함벽정야연(涵碧亭夜讌)에서의 시(詩)를 가져 옵니다.

傘樣天開野望空   우산 모양 하늘 열리어 먼 들판 바라볼 제

簷燈影碎遠江風   처마 밑 등불 빛은 먼 강바람에 부서지는데

諸君解使秋宵短   제군은 짧은 가을밤을 좋이 쓸 줄 알아서 

聯袂行歌明月中   밝은 달 아래 서로 손 잡고 거닐며 노래하네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함벽정야연(涵碧亭夜讌)에서의 또다른 시(詩)로,

兩行秋柳一灣沙  두 줄 가을 버들 늘어진 한 물굽이 백사장에

拂袖亭亭野菊花  옷소매 떨치며 우뚝 섰는 건 들국화로다

莫向西風怨搖落  서풍을 향해 흔들려 떨어짐을 원망 마소

古來白髮似君多  예로부터 그대 같은 백발이 하 많았다네

 

 

 

왕궁저수지(王宮貯水地)를 완공하면서 세운 정자로,

대부호 였슴에도 곡물을 풀어 구휼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도로를 내는등,

지역발전에 공을 들여 헌신했던 표정(瓢庭) 송병우(宋炳雨)를 통하여,

현대의 부자들에게 전하고 시사하는 바가 큰 유적으로 전북 익산의 정자 문화재, 함벽정(涵碧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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