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을 여행하면서,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을 찾았습니다.

 

사적 제40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도 지정 되었으며,

 

 

 

익산왕궁리5층석탑으로 더 많이 알려진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은,

면적이 21만 6,862㎡에 이르며 왕궁리성지, 모질메산성, 왕궁평성(王宮坪城),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익산왕궁리토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며,

이곳의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곳 이기도 합니다.

 

 

 

왕궁리유적은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히며,

 크기를 떠나 왕궁리유적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왕궁리유적터가 백제의 왕도였다는 왕도설과,

백제 후기 익산 천도설 등의 역사적 가설에 뒷받침이 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며,

익산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학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발굴후 옛 흔적만 아스라이 남아 있는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의 백미는 국보 제289호인 익산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으로,

높이 8.5m이며 기단부에 탱주(撑柱)가 2개 있는 사각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 되었고,

옥신부는 4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 하였으며,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며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석탑의 갑석은 폭이 좁고 얇은 편이며 그 밑에는 부연이 마련되어 있고 위에는 낮은 탑신 굄이 있으며,

탑신부의 옥개석과 옥신석은 각기 여러개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1층 옥신에는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 있고 2층 옥신부터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얇고 넓은 옥개석은 편평하게 내려오면서 처마 끝부분이 약간 올라갔으며 3단받침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상륜부는 일부 파손되었으나 현재 노반·복발·앙화·보륜 등이 남아 있습니다.

왕궁리5층석탑은 기단부가 단층인 점, 옥개석의 폭이 넓고 편평한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3단인 점 등에서,

같은 지역에 있는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형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나,

1965년 탑을 보수할 때 1층 옥개석과 기단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계 석탑의 전통을 반영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을 돌아보고 유적지 입구에 있는 왕궁리유적전시관(王宮里遺跡展示館)으로 향합니다.

전시관(展示館)은 2008년 2,250㎡ 규모로 개관 하였으며,

 

 

 

전시관 앞 야외 전시장에는 "왕궁리유적 출토기와"가 있어,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많은 기와는 왕궁의 건물이나 담장 지붕과 사찰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시대별로 만드는 흙과 제작 방법, 기와의 무늬에서 차이가 있어서 유적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 이기도 합니다.

 

 

 

기와편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석물들도 진열해 두어,

 

 

 

석재들은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 계단석, 담장석, 정원석, 탑의 노반받침, 옥개석, 기단 갑석 등으로 67점을 전시되어 있어,

같은 종류의 석제품 이라도 사용된 건물이나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어서,

석재의 유구들을 통하여 왕궁리유적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의 배치도로,

상설전시실은  5개의 전시실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으며,

 

 

 

왕궁리유적전시관(王宮里遺跡展示館)은 유적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부"명 인장과, "왕궁사" 명기와, 중국 청자호편, 연화문수막새, 금제품, 유리제품 등 9천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어 출토 유물을 전시 되어 있고,

왕궁리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전시 해두어,

 

 

 

전시관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포토존으로,

옆에 왕이나 귀족의 의상이 신발과 함께 준비되어 있어 기념 사진을 남길수 있고,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을 모형으로 해두어 유적지를 쉽게 이해 할수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을 통해서,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적고 있어,

이러한 자료와 왕궁리유적의 발굴로 "익산 왕도설"이 유력한 사실이지만,

익산이 백제의 왕도 였다는 "왕도설" 등은 아직까지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전시관(王宮里遺跡展示館)에는 출토된 다양한 유물로,

유물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을 기초로 쓰임새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어,

 

 

 

와적기단(瓦積基壇)은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기단 형식으로,

기단은 건물 하단에 위치하는 높은 대를 말하며,

지면으로부터 발생한 습기가 건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 통풍과 채광 등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기법으로,

백제 와적기단의 축조방식 가운데 오른쪽은 "수직횡렬식"으로 기와를 수직으로 세워 서로 겹치지 않게 연결한 것이며,

왼쪽의 합장식은 기단부를 일정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마다 기와를 서로 엇갈리게 세워서 쌓아,

앞에서 보면 마치 생선뼈와 같이 보여 장식성이 돋보이게 하였으며 두가지의 축조방식 외에도 "수직횡렬식"과 "복합식" 등이 있습니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연가(煙家)도 진열해두어,

 배연시설인 굴뚝의 형태에는 원형, 방형, 다각형 등이 있으며,

굴뚝의 상부에는 연가(煙家)를 얹어 연가의 몸체 부분에 나있는 구멍으로 연기를 뽑아내는 역활을 하며,

연가는 연기 배출과 비가 들어가는것을 방지하며 장식성도 있으나 연기으 역류를 막는 실용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출토 유물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의 모형으로 설명 해주고 있어,

왕궁리유적의 특징중 하나인 대형 화장실을 모형으로 재현해둔 모습으로,

왕궁의 부속시설로서 공중변소는 토광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앞에 작은 항아리의 나무막대는 대변을 본 후 뒤처리를 하던 도구 입니다.

 

 

 

왕궁의 부속시설로는 금, 유리, 동의 제련과 제품의 생산시설인 "공방지"가 있어 금속공방을 재현 해두어,

"서동(薯童)이 금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와 같이,

백제 무왕은 금을 중요시하여 왕궁 내에 생산시설을 두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관리 하였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연꽃무늬 수막새(蓮花文圓瓦當)로,

수막새(圓瓦當)이란 처마 끝에 덮는 수키와에 와당이 달린 기와를 말하며,

왕궁리유적 내 사찰의 중심 연대가 통일신라이기 때문에 사찰관련 막새기와는 대부분 통일신라기의 수막새와 암막새로,

선명하게 돌출되어 있는 연꽃 문양이 아름답습니다.

 

 

 

유적전시관의 상설전시실은  백제의 왕궁 왕궁리유적 ,  왕궁리유적의 백제건물,  왕궁의 생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백제왕궁 등 5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익산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을 모형으로 전시해두어,

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탑주변에서 "왕궁사" "대관" 등의 명문기와가 수습되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탑의 해체 복원시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부에서 금제 금판경과 사리함, 청동불상 등이 수습되어 국보 제 123호로 지정 되었는데,

이들 유물이 "관세음 음험기"에 나오는 제석사지 칠층목탑 내의 유물과 같은 종류이어서,

제석사지 목탑과 관련되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백제 석탑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이며,

석탑 하부에서 백제시대 판축이 확인되어 백제 시대 목탑 또는 건물지가 있던 것으로 여겨 집니다.

 

 

 

석탑의 모형에는 1965년 익산왕궁리5층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된 고려시대 사리장엄이 있던 부분을 묘사 하고 있습니다.

 

 

 

왕궁리 유적의 정원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인 후원으로,

왕궁내에는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방지(方池)형의 조경시설로,

방형의 연못(方池)과 수로가 연결되어 있는 궁원(宮苑)의 전체 구조가 발견 되었습니다.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하던 모습을 재현해 두어,

왕궁의 축조 과정을 알수 있게 해 두었고,

 

 

 

왕궁리 궁궐 에서의 왕의 연회를 재현해 두었습니다.

 

 

 

백제 왕궁터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출토된 곳이며,

무왕과 왕후는 사후 익산 쌍릉에 모셔짐에 따라 무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나,

아니면 백제 멸망후 세력의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는 곳으로,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 방문기 입니다.


관람안내 ; 관람시간 ; 09;00~18;00 

             휴관일 ; 1월1일, 매주 월요일

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70 (왕궁리562)  063)859~463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