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칠곡의 문화재 탐방에서,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고택 묵헌종택(默軒宗宅)을 찾았습니다.

 

묵헌종택(默軒宗宅)은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245호로 지정되었으며,

광주이씨 칠곡파(廣州李氏漆谷派)는 고려 말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생원 이지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세거 성씨로,

전라도 임피에서 칠곡으로 이주한 한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부근의 유력 가문과 혼맥을 맺었으며,

선산지방의 신천강씨·선산김씨, 성주지방의 벽진이씨, 대구의 인천채씨 등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매원·석전 등지로 거주 범위를 확산시키면서 기반을 다져갔으며 재지적 기반을 굳게 다진 광주이씨 칠곡파는 퇴계학을 계승 하였으며

17세기 들어 석전파에서 3명의 과거 합격자가 배출됨으로써 명문의 반열에 올라 섰습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와 중문채가 연이어 서 있어,

종택(宗宅)의 안채와 사랑채는 문익공(文翼公) 이원정(李元禎,1622~1687)의 차자인 이한명(李漢命,1651~1687)이 건립 하였으며,

사당(祠堂)은 5대손인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1820)이 별세한 후 유림공론(儒林公論)으로 1820년(순조 20)에 건립 하였습니다.

 

 

 

사랑채 마당에서 보이는 대문채로 맞배지붕의 3칸 규모이며,

원래 묵헌종택(默軒宗宅)에는 규모의 대문채와 방앗간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수 없으며,

 

 

 

사랑채는 정면 10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언듯 보아 영남 북부지역의 전형인 "ㅁ"자 형태를 보이나 가운데 중문이 없이 10칸이 연이어 있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채의 마루 앞쪽에는 정원으로 꾸민듯 나무와 화단이 있고,

 

 

 

정원 한쪽에는 건물을 보수하고 고쳐 지으며 나온듯,

기와와 돌들을 모아 두었습니다.

 

 

 

2칸의 사랑 대청은 방으로 통하는 곳에,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여름의 시원함을 더 하고저 한듯 하며,

 

 

 

사랑채는 지형 관계로 기단을 다소 높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홑집으로,

우측에는 큰사랑을 좌측에는 작은사랑을 배치 하였고 사랑채는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 입니다.

 

 

 

"一"자 형의 사랑채 뒤에는 안채가 있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로 "U"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2통칸 안방과 3칸 대청을 정면에 두고 좌·우로 회첨시켜 방을 배치하였는데,

좌측에는 부엌과 아랫방을 우측에는 고방과 건넌방, 부엌을 두어 U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어,

 

 

 

"一"자 형의 사랑채와 "U"자 형의 안채가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배치형태가 개방적이고 지역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안채는 나지막하게 조성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대청의 후면에는 각 칸마다 영쌍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 설주홈만 남아 있고,

안채는 3량가이며 제형판대공이 마룻대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지은 이한명(李漢命,1651~1687)은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광주(廣州) 자는 남기(南紀) 호는 낙애(洛涯)로,

1651년(효종 2)에 태어나 1666년(현종 7)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699년(숙종 25)에 문과에 급제 했으며,

벼슬은 한림(翰林)을 역임 했는데 모두 4대(代)를 이어 한원(翰苑)에 들어간 것으로,

벼슬은 교리(校理)에 이르렀으며 한원(翰苑)에 있을 때는 숙종이 연소하지만 박식(博識)하다고,

유신(儒臣)과 같이 경연(經筵)에 들어와 치도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고 주역(周易)을 진강하게 하였고,

한 때 문학의 선비를 선택할 때 이한명(李漢命)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사후 홍문관 응교에 증직되었고 참판공 이담명(李聃命)이 묘지(墓誌)를 지었습니다.

 

 

 

대청 옆으로 2칸의 안방이 있고,

앞쪽으로 내어 부엌과 아랫방이 차례로 연이어 있으며,

 

 

 

부엌 문위에 또다른 작은 문이 있어,

부엌위의 다락으로 여겨 지는데 다락의 문은 통상 안방에서 통하고,

바깓쪽에는 창만을 두는게 일반여서 바깓의 다락문은 특이해 보입니다.

 

 

 

안방 앞에도 쪽마루가 없이 섬돌만 놓여 있는 모습이고,

 

 

 

안채의 옆에는 작은 정원과 장독대가 자리해 있으며,

 

 

 

안채를 비켜선 뒷편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사당(祠堂)은 1820년 5대손인 이만운(李萬運)이 별세한 후 유림공론(儒林公論)으로 세웠는데,

이만운(李萬運,1736∼1820)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묵헌(默軒)으로,

생원시를 거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 때 4대조 이담명(李聃命)이 앞서,

숙종연간의 경신환국 때 희생된 그 아버지 이원정(李元禎)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형벌받은 일로 인하여 벼슬길이 막혔고,

1796년칠곡으로부터 중앙에 불려 들어와 안의혐감에 제수되고 그 뒤 지평에 이르렀으며,

천문·지리·역산(曆算)·명물(名物)에 밝았으며 저서로 "묵헌문집(默軒文集)"이 있고,

조선 후기의 문신 퇴계, 한강, 문익공을 잇는 정통 성리학자로,

우리 국학(國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등을 편찬 하였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규모의 3량가로 대량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세웠으며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며,

기단은 전면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 놓고 각주를 세웠고,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정면에서 보았을 때 어칸에는 쌍여닫이 널문을 양측칸에는 외여닫이 널문을 달았습니다.

 

 

 

광주이씨 칠곡파(廣州李氏漆谷派)는 우리나라의 길지이며,

민속마을로 유명한 인근의 매원마을 에서도 찾을수 있고,

광주이씨(廣州李氏) 석전파의 종가인 경북 칠곡의 "묵헌종택(默軒宗宅)"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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