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의 정자 문화재 탐방에서.

장흥읍 연산리의 탐진강변에 잇는 정자 창랑정(滄浪亭)을 찾았습니다.

 

 

도로에서 창랑정(滄浪亭)으로 오르는 길은 눈이 쌓여서 조심조심 올라야 했고,

탐진강변에는 창랑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자들이 있어,

부춘정, 용호정, 동백정, 수녕정, 흥덕정 등 경관이 수려한 정자가 많이 있으며,

 

 

 

창랑정(滄浪亭) 1918년에 길행식(吉幸植)이 건립 하였는데,

모 처에는 철종 1년(1850)에 해평길씨(海平吉氏) 길신식(吉幸植)이 창랑정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장흥읍지(長興邑誌) 병오지(丙午誌)에도 길행식(吉幸植, 1893~1957)이 세웠다고 되어 있고,

정자 내부에 걸려 있는 상량문(上樑文)에 무오(戊午) 추(秋) 7월로 기록되어 있어 창랑정은 1918년에 건립 되었슴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은 정신수양과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때로는 풍류를 즐기며 시국을 논하는 장소로 이용하여 오다가

1946년 문중에 헌납되어 종회(宗會) 및 풍영소(諷詠所)로 사용되어 오다가,

2008년 후손들이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장흥군에 무상으로 기증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창랑정(滄浪亭)은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북향(北向) 배치되어 있으며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고,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팔작집으로 정면 동쪽으로는 반 칸을 더 두었으며,

평면 구성은 동측으로부터 삼면이 열린 대청을 중앙으로는 전후의 툇마루 사이에 방을 설치하고,

뒤쪽으로 다시 1칸 방을 두고 앞쪽으로는 대청보다 1척(尺) 5촌(寸) 정도 높게 누마루를 설치 하였습니다.

 

 

 

창랑정(滄浪亭)의 현판이며,

정자명의 "창랑(滄浪)"은 중국 한수(漢水)의 하류 지역에 있는 강 이름으로,

"세상 모든 일을 자연에 맡기고 이 세상과 거슬리지 않음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창랑(滄浪)은 굴원과 관련이 있어 초나라 대부이자 우국지사였던 굴원은 정적들로부터 중상모략 당하여 창랑에 유배돼 "어부사"를 지었고,

어부사를 창랑가라고도 하는데 많이 알려진 "창랑가" 일부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의미를 찾을수 있습니다.

 

 

 

창랑정(滄浪亭)은 근자에 문을 비롯하여 여러곳에 보수를 한듯,

원래의 목재에 새 목재가 곳곳에 보이고,

 

 

 

창랑정(滄浪亭)은 삼면에 마루를 두고 중앙 뒤편에 방을 들여,

호남지역의 전형적인 정자 양식을 보이나 한쪽 옆면은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를 들였고,

누마루 안쪽에는 1칸반의 방과 1칸의 방을 두어 특이 하며,

 

 

 

정자의 옆면 문위에는 대형의 제일강산(第一江山) 편액이 있어,

편액은 판재 여러 개를 세로로 이어 제작 하였으며 낙관이 없어 김구 선생글씨라는 설은 있지만 설에 불과하며,

"第一"과 "江山"의 글씨체가 달라서,

"第一"은 파격적이지만 멋스럽게 흘려 쓴 행서체 이나 "江山"은 해서에 가까운 글씨 입니다.

 

 

 

커다란 편액 아래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문으로 넌출문으로도 불리며,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을 접어 들어 올려 열어두면 정자의 정취를 방안까지 들일수도 있습니다.

 

 

 

작은 방은 닫혀 있으나 큰방은 열려있어 들여다 보고,

 

 

 

정자의 대청에서 누마루를 올린곳의 모습으로, 

안쪽에는 1칸의 방을 두었으며,

 

 

 

대청에서는 여러 편액들을 볼수 있어,

 

 

 

신유년 늦여름(辛酉晩夏) 천우생(天愚生)의 "제창랑정(題滄浪亭)" 시판(詩板)으로,

荒崖懸磴自春秋(황애현등자춘추)   거친벼랑에 매달리듯한 돌계단길로 세월을 보내니,

忽得新亭起盡頭(홀득신정기진두)  갑자기 새 정자가 벼랑 끝에 세워졌네.

燕雀微風啼廬屋(연작미풍제려옥)  제비와 참새가 산들바람 부는 집에서 울고,

魚龍落日戱中洲(어룡낙일희중주)  물고기와 용은 지는 해속에 강위의 섬을 희롱하네.

平郊牧篴來來近(평교목적래래근)   인근 들판의 목동의 피리소리는 올수록 가깝고,

遠峀浮雲去去悠(원수부운거거유)  먼 산굴의 뜬구름은 갈수록 멀어지네.

爲奏滄浪歌一曲(위주창랑가일곡)  그대들 위하여 창랑의 노래 한곡을 연주하지만,

長江千里不能體(장강천리불능체)  장강 천리에 알아듣는 이 없구나

 

 

 

제창랑정(題滄浪亭) 외에 2기의 시문(詩文) 편액이 있고,

 

 

 

한글로 쓰여진 4편의 시판(詩板)을 볼수 있으며,

 

 

 

창랑정기(滄浪亭記)의 기문(記文)과,

 

 

 

창랑정상량문(滄浪亭上樑文)이 편액이 올려져 있습니다.

 

 

 

창랑정(滄浪亭)은 탐진강변 박림소(朴林沼)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탐진강과 주변의 숲이 어우러져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정자 앞으로는 탐진강 전 유역에서 거의 2Km에 달하는 가장 큰 호소인 박림소와 장흥읍 북쪽의 부산평야(夫山平野)가 한눈에 들어 온다는데,

겨울철 임에도 나무들에 가리어 이런 경치를 볼 수 없어 아쉬우며,

 

 

 

천우생(天愚生)의 "제창랑정(題滄浪亭)" 일부를 가져 옵니다.

四面靑山盡納頭 (사면청산진납두)   사방의 푸른 산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네.

十里行人芳草路 (십리행인방초로)   10리 길 가는 행인들은 우거진 풀길로 지나고

一竿漁父綠楊洲 (일간어부록양주)   낚시대 하나 드리운 어부는 버들 푸른 섬에 앉았네.

鏡中水石眞奇絶 (경중수석진기절)   거울 속의 물과 돌은 참으로 진기한 절경이나

蝸角功名總診悠 (와각공명총진유)   달팽이 뿔 위의 공명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라네.

最善吉君多意趣 (최선길군다의취)   길군(吉幸植)이 깊은 정취를 가장 잘 살려낸 곳이니

蒼頭他日此歸休 (창두타일차귀휴)   뒷날 머리 센 뒤 여기에 와 쉬리라

 

 

 

창랑정(滄浪亭)의 마루에서 내려와,

정자의 옆면을 살펴보니 온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가 누마루 아래에 있슴을 알게 되고,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던 작은방 뒤편에는 벽장이 있고,

벽장 부분을 선방으로 받치듯 2곳에 다리를 두어 견고함을 위한 모습에 눈길이 갑니다.

 

 

 

장흥 탐진강의 박림소(朴林沼) 바로 위쪽에 자리하여,

탐진강과 부산평야 일대를 굽어 보며 서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길행식(吉幸植)이 세운 탐진강변의 정자,

전남 장흥의 창랑정(滄浪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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