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을 여행 하면서,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한옥마을 에 있는 조선시대의 왕실 묘사(廟祠)인,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을 찾았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근대식 한옥들을 짓기 시작하면서 발전 하였고,

1930년대 중반 뜻있는 선비들과 주민들이 풍남문 동쪽에 집단으로 한옥을 건립하고 마을을 건설 했으며,

지금은 한국의 전통 건물인 한옥(韓屋)이 800여 채나 밀집되어 있어,

전주한옥마을은 국제적인 문화관광의 명소가 되어,

한 해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국제적인 문화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목적지인 경기전(慶基殿)으로 가는 도중,

사적 제379호 "전주향교(全州鄕校)"가 있어 잠시 들여다 봅니다.

 

 

 

전주향교(全州鄕校)는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 하였다가,

1603년(선조 36)에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 하였습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며,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으로,

고려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향학(鄕學)의 시초이며 서원(書院)이 사립이라면 향교(鄕校)는 공립으로 여기면 이해가 편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전주향교(全州鄕校)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경기전(慶基殿)으로 향합니다.

 

 

 

높은 담장의 전각의 건물과 도로옆 화단이 보이며,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의 입구가 있으며,

전주한옥마을의 전동성당과 길을 두고 서로 마주하듯 가까이에 있습니다.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은 규모가 있는편여서,

미리 배치도를 살펴보고 경기전을 거쳐 왼쪽을 돌아 어진박물관을 거쳐 부속건물로 마무리하는것으로 코스를 정합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어,

홍살문(紅薩門)은 원래 정문 밖 서쪽에 있었는데 중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홍살문을 지나면 담장을 두른 외삼문인 외신문(外神門)이 자리하고 있어,

외신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고,

 

 

 

외신문(外神門) 안에는 홍살이 있고 가운데 문양을 두어,

아(亜)자의 모양과 사찰에서 볼수 있는 만(卍)자의 형상도 볼수 있으며,

 

 

 

외신문을 들어서면 다시 내삼문인 내신문(內神門)이 보이고,

 

 

 

내삼문인 내신문(內神門)은 3칸이며,

내신문 좌우에 각각 첨각(簷閣)이 2칸 있어 첨각에는 작은 문을 설치하여 참봉 등 관리들은 이 문으로 출입 하였다고 합니다.

 

 

 

내신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경기전(慶基殿)이 있어,

1410년(태종 10)에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세 곳에 창건하여,

부왕인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관원으로 영(종5품) 1명, 참봉(종9품) 1명을 두었는데,

1442년(세종 24)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불렀으며,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영정은 묘향산 보현사에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고,

1614년(광해군 6)에 전라도관찰사 이경전(李慶全)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건하였고 당시의 중수상량문(全重修上樑文)이 남아 있습니다.

 

 

 

경기전(慶基殿) 정전은 보물 제1578호로 지정 되었으며,

전은 우리가 왕릉에서 볼수있는 릉에 제사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으며,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세웠습니다.

 

 

 

정전 앞에는 솥같이 생긴 "드무"의 배열을 볼수 있는데,

뜰 아래 좌우에 있는 6개의 드무(豆毛, 두멍)는 평소에 물을 길어 담아 놓아 방화에 대비하는 용도이며,

겨울철에는 소금을 넣어 어는 것을 방지 했다고 합니다.

 

 

 

기단위 모서리에도 낮고 둥근 석물이 있는데 용도는 알수 없으며,

 

 

 

경기전(慶基殿)은 정전 내부의 세번째 기둥렬(柱列)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아 어진(御眞)을 모셨으며,

 

 

 

국보 제317호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그린 초상화인 "어진(御眞)"으로,

경주와 평양 등지에 잇었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고,

묘향산으로 옮겼던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게 되었으나,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태워 묻고 한양 영희전의 1442년에 그린 것을 태조 어진을 본떠 고쳐 그린 것으로,

조선태조어진은 익선관과 곤룡포를 착용한 채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正面交椅坐像),

태조는 본래 무인으로서 풍채가 좋았다고 전하며 태조 어진은 신장이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위풍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형식은 대만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명태조상(明太祖像)과 흡사하며,

얼굴과 옷주름을 처리한 음영기법이나 의자와 자리의 화려한 색채 그리고 어깨에 그린 용의 금박효과 등 에서 높은 품격이 보입니다.

 

 

 

어진의 왼쪽에는 붉은색 일산(紅日傘) 1개와 용선(龍扇) 1개가 있고,

청개(靑蓋) 1개, 봉선(鳳扇)1개, 홍개(紅蓋) 1개를 각각 두었으며,

 

 

 

오른편에는 홍양산(紅陽繖) 1개와 용선 1개, 청개 1개, 봉선 1개, 홍개 1개를 두었으며,

운검(雲劒) 1쌍을 정전 안에 세워 두었습니다.

 

 

 

정전 앞에 덧대어 있는 1칸의 첨각인 정자각(丁字閣)은,

의례시 제사에 바칠 술을 따르는 준소(樽所)가 설치되며 집례자가 서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철종 5년과 7년에 수리가 있었고 고종 연간에도 대대적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던 경기전(慶基殿) 정전은,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정전(正殿) 기능과 내신문(內神門) 내 신로(神路) 및 향로(香路)의 엄격한 격식 구비,

정전과 배례청(拜禮廳)의 평면 조합과 어방(御房 : 어진을 모신 방)구조 등의 특색으로,

남한에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진전 이며,

건물의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고 견고하여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 등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기전에서 나와 왼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하여 나가봅니다.

 

 

 

문을 나서면 바닥에 돌을 깔아두어 동선을 표시해 두었고,

 

 

 

겨울임에도 푸른 대나무숲이 있어,

경기전(慶基殿)을 찾은 이들에게 휴식과 포토존이 되기도 하며,

 

 

 

경기전 에서는 유명한 참죽나무와 은행나무 등 많은 수목들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보호를 받고 있는 노거수도 휘어진 모습으로 눈길을 잡습니다.

 

 

 

복원한 전주사고(全州史庫)인 실록각(實錄閣)으로,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전주사고가 설치되어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 하였고 1473년(성종 4)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 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해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가,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실록을 다시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실록각(實錄閣) 옆에는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가 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해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실록을 옮길때,

조선 전기의  방대한 역사를 지켜낸,

당시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고 합니다.

 

 

 

전라북도 지방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예종대왕 태실(睿宗大王胎室)과 비(碑)로,

비(碑)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며,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 새겨 주인을 밝히고 있는데,

비석 뒷면의 기록에는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함께있는 "예종대왕 태실(睿宗大王 胎室)"은 조선 예종의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둔 석실로,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탯줄을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형태는 승려의 사리탑과 비슷하며 이를 태실이라고 하며,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에 다시 고쳐 세웠는데,

1928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것을 1870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합니다.

 

 

 

예종대왕 태실을 지나 산책하듯 경기전 후면으로 향하면,

 

 

 

홍살문이 나오고 전북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경묘(肇慶廟)가 있어,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李翰)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조경묘(肇慶廟)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수 없으며,

매년 음력 9월9일 중양절에 제사를 모시는 조경묘(肇慶廟)는 1771년(영조 47)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조경묘를 지나면 "어진 박물관"이 있어,

 

 

 

2010년 개관한 어진 박물관은 태조 어진(御眞)을 봉앙하기 위해 세웠으며,

어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만날수 있는곳으로,

 

 

 

어진 박물관에서 가장먼저 만나게 되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로,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고 하며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라고 불리기도 하며,

달과 해 앞의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주로 병풍으로 그려져 조선 시대 어좌의 뒷편에 놓였는데,

해와 달은 "음양"을 상징하며 다섯 봉우리는 "오행"을 상징하며 이러한 "음양오행"은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는 세계관으로 "우주"를 의미 합니다.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으로,

태조 어진(御眞)은 1410년에 처음 제작됐다가 1763년(영조 39년)에 한차례 수리를 거치고 나서,

1872년(고종 9년)에 조중묵이 모사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50cm, 세로 218cm 이며,

이 어진은 현존하는 어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화폭이 크고 상태가 좋으며 각종 고서에 제작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어진 박물관에서는 태조 어진 외에도 조선 임금들의 어진들을 함께 볼수 있으며,

 

 

 

무형문화재 선자장 였던 고(故)이기동옹의 작품인 "황칠 용문 자개선"으로,

박쥐는 "음(陰)"을 상징하여 더위인 "양(陽)"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부채 입니다.

 

 

 

어진 보관통이며 전란등으로 긴급히 대피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 통인 "흑장통(黑長筒)"으로,

어진 족자를 둥글게 말아서 넣을 수 있도록 기다란 원통형의 몸체에 용무늬가 조각된 뚜껑이 있으며,

흑장통을 넣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두 개의 긴 끈이 달린 원통형의 가죽주머니를 갖추고 있고,

몸체와 뚜껑의 표면 전면에 흑칠이 되어 있고 몸통 내부에는 비단이 발라져 있습니다.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했던 가마인 신연(神輦)이 전시되어 있고,

 

 

 

어진을 모시는 행렬을 재현해 두었는데,

닥종이 인형으로 제작한 반차도로 한지로 인형들을 만들어 두어,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하나의 모양과 표정이 재미 있게 해 두었습니다.

 

 

 

어진을 담아 보관하는 궤인 흑장궤(黑長櫃)로,

어진을 봉안할 때에는 이 흑장궤에 넣어 신연(神輦)라는 가마로 모시게 됩니다.

 

 

 

조선시대 고관의 행차 때 사용했던 가마인 "가교(駕轎)"로,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어진 벙안 책임자인 배왕대신(陪往大臣)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전 서편에는 2004년에 복원된 부속건물이 있어,

전관 참봉이 근무하는 등의 부속건물들로 서재(西齋)와 동재(東齋)외 전사청(典祀廳)과 시위군이 거처하는 시위청(侍衛廳) 등의 건물이 있으며,

 

 

 

수문장이 거처하는 수문장청인 경덕헌(慶德軒)으로,

경덕헌은 경기전 일곽을 지키는 수문군들이 일을 맡아보는 곳으로 수문장청의 당호 이며,

 

 

 

수복청(守僕廳)은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원들이 수직하는 곳으로,

살림집의 형식이지만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며,

"세조실록" 세조 8년 8월 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에 수복의 수가 관노(官奴) 1명, 양민(良民)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하여,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수복청은 부속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며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시조(始祖)의 본향인 전주에 자리하여,

조선 왕조의 뿌리를 알수 있으며,

조선시대 태조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향하였던 공간들을 살필수 있는곳으로,

전주한옥마을에서 돌아본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 탐방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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