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의 탁청정(濯淸亭)을 찾았습니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은,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光山金氏 禮安派)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곳으로,

외내에 있었던 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과 그 밖의 고가들을,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새로 옮겨 놓은 "오천유적지" 입니다.

 

 

 

오천유적지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 탁청정(安東濯淸亭)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탁청정은 1541년(중종 36) 김유(金綏)가 지은 안동 광산김씨 탁청정공파 종택(安東 光山金氏 濯淸亭公派 宗宅)에 딸린 정자로,

영남지방에서 개인 정자 중 그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리(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에 오천 문화재단지내인 현 위치로 이건 하였습니다.

 

 

 

정자는 정면 3간 측면 2간 규모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측면의 간살을 정면보다 2척씩을 넓게 잡아 전체적으로는 정방형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방2칸에 대청 4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측간을 통간 온돌방으로 꾸미고 우측의 4간은 모두 우물마루로 꾸몄습니다.

 

 

 

4칸의 널직한 마루에 오르면,

차를 즐기면서 정자의 정취를 느낄수 있게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호이며 현판은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

탁청(濯淸)이란 이름은 굴원의 고사인 "어부사"에서 가져왔으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탁청정 현판은 당대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솜씨로 이 현판은 그 획과 점들이 듬직한 가운데 글자 하나하나가 생동하는 느낌을 주는데,

외내에는 이 현판을 쓸 때의 설화가 전하고 있어, 

탁청정의 현판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자 한석봉은 지체 없이 하경하여 탁청정에 이르게 되고,

그는 탁청정 현판감을 내리지 말고 벽상에 걸어놓으라고 요구 했는데,

워낙 자신에 찬 글씨 솜씨라 벽상에 걸어놓은 판자에 탁청정(濯淸亭) 석자를 쓰고자 한 것으로,

그는 붓에 먹을 듬뿍 적신 다음 사다리를 타고 글씨를 쓰기위해 위로 올라갔고 그것을 아니꼽게 본 문중 어른 한 사람이 발길로 사다리를 걷어 찼는데,

그때 한석봉은 마침 탁(濯)자 둘째 점을 찍는 찰나였는데 그 점을 찍은 붓이 판상에 박혀 한석봉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전하며,

지금도 씻을 탁(濯)자를 보면 특히 굵고 힘있게 되어 있어 이것은 당시 한석봉이 힘을 거기에 싣고 몸을 매단 자취라는 것으로,

물론 이것은 실제 일어나 일이 아니었으며 명필 설화의 일종으로,

이 이야기는 과장됨이 많다고 여겨지나 탁청정의 현판 글씨는 보면 한석봉(韓石峰)의 강한 힘이 느껴 집니다.

 

 

 

탁청정(濯淸亭)에는 퇴계, 금계, 농암, 청풍자 등 당대 명유(名儒)들의 시가 현액(懸額)되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리 많지 보이지않고 알아보기 힘든 시문(詩文)들이 많으며,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명종조(明宗朝)에 지평(持平),목사(牧使)를 지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시로,

次(차)                                    차운(次韻)하여 지음

新斸荒巖揷畵亭(신촉황암삽일정)    새로 깎은 거친 바위 위 그림같은 정자 지었어라

憑闌拾得好詩生(빙란습득호시생)    문설주에 기대어 좋은 시 한 편 얻고 지고

風獻錦瑟蒼松動(풍헌금슬창송동)    바람 불어 비단무늬 거문고 소리 푸른 솔 흔들고

露重仙盤翠藕傾(로중선반취우경)    이슬이 선반(仙盤)같은 연잎 눌러 푸른 뿌리가 기울었네

滿甕香雲賓取醉(만옹향운빈취취)    동이에 가득 향기로운 술, 손님 먼저 취하고

一枰晴雹客來爭(일평청박객래쟁)    바둑판 위 청천(晴天)의 우박소리 손님들 와서 다투네

幽人暫借元龍臥(유인잠차원룡와)    은둔하는 선비 이곳 잠깐 빌려서 원룡(元龍)같이 누우면

玉簟氷簾千夢淸(옥점빙렴천몽청)    대자리 시원한 주렴(珠簾)에 꿈이 절로 해맑아라

 

 

 

1544년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 현액시(懸額詩)입니다.

次(차)                                     차운(次韻)하여 지음

堦下方池池上亭(계하방지지상정)    계단 밑은 모난 못, 못 위에 정자인데

風傳欄檻嫩凉生(풍전난함눈량생)    난간이며 헌함에 바람 부니 시원한 기운 조금 일도다.

溪環谷互前山擁(계환곡호전산옹)    빙 둘러친 개울물 골짜기 더불어 앞산을 끼고

簷豁天低北斗傾(첨활천저북두경)    처마는 넓고 하늘은 낮아 북두성이 기울었네

坫上酒盈留客醉(점상주영유객취)    선반 위에 가득한 술, 손님 먼저 취케 하고

軒邊侯設聚隣爭(헌변후설취린쟁)    헌함 가의 활 장막에 이웃들 모여 다투누나

幸吾老退閑無事(행오노퇴한무사)    다행히 내가 늙어 물러나서 무사하니

邀輒來分一味淸(요첩래분일미청)    부르면 얼른 가서 맑은 흥취 나눌까 하노라

 

 

 

탁청정에 걸려있는 퇴계(退溪)의 벽상시는 7언율시로

탁청정 주인인 김유에 부쳐서(寄題 金綏之濯淸亭主人)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어,

 이 시액은 총 글자수가 112자인데 그 가운데 초서인 것은 스무 자 가량이고 나머지는 해서체가 아니면 행서체로,

山擁溪回抱一亭(산옹계회포일정)    산이 둘러치고 시내 휘돌아 정자를 안았는데,

主人非是冷書生(주인비시냉서생)    주인은 틀림없이 차가운 선비 아니로세

珍羞八百叱奴取(진수팔백질노취)    진귀한 음식 여러 가지 800명 노복(奴僕)시켜 대령하고

美酒十千投轄傾(미주십천투할경)    맛 좋은 술 무수(無數)히 술잔을 기울였네

斫樹奇模人未識(작수기모인미식)    나무를 베어낸 기이한 모책(謀策) 사람들은 몰랐는데

穿楊妙技客誰爭(찬양묘기객수쟁)    버들 뚫은 묘한 재주 어느 손(客)이 다툴 손가

濯淸儘有風流在(탁청진유풍류재)    탁청 주인 적잖이 풍류(風流)가 있어서

竹簟氷肌到骨淸(죽점빙기도골청)    대자리처럼 고운 피부 뼛속까지 해맑아라

 

 

 

정자는 주심포계의 이익공(二翼工)집인데 익공쇠서에는 주먹초와 부리초를 초새김 하였고,

가구(架構)는 종량(宗樑)위에 연화각(蓮花刻)한 포대공(包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5량가(五樑架)의 견실한 구조 입니다.

 

 

 

탁청정(濯淸亭)을 세운 김유(金綏,1491~1555)의 본관은 광산 자는 유지(綏之) 호는 탁청정(濯淸亭)으로,

1525년(중종 20) 생원시에도 합격 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있는 형을 대신해 청운의 꿈을 접고 고향에서 부모님을 공양 하였고,

과거를 포기하고 집 근처에 탁청정을 짓고 예안 고을을 지나는 나그네를 정중하게 대접 하였다고 하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도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선성지(宣城誌)에 의하면 퇴계 이황(李滉)은 “타고난 재질은 빼어났는데 시골에서 헛되이 늙어 가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는 활쏘기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호탕하고 사람을 좋아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접해서 탁청정엔 항상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선하지 못한 사람들은 엄하게 물리쳤으며 바르지 못한 행동은 용납치 않았던 영남의 전형적인 사림인(士林人)으로 살았습니다.

큰아들인 김부인이 경상도좌병사를 역임함으로써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조선 최고의 요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이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선비사상을 표현하는 장방형의 연지가 있고,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명종조 관찰사를 지낸 어은(漁隱) 임내신(任鼐臣,1512~?)의 시문(詩文)을 가져 옵니다.

次 (차)                                   차운(次韻)하여 지음

溪山閑興屬君亭(계산한흥속군정)   계곡 깊은 산중의 한흥(閑興)을 그대 정자에서 이루니

有酒長酙樂此生(유주장짐락차생)   술이 있어 오래도록 마시며 이승이 즐겁도다

豈獨隣家翁與共(기독린가옹여공)   어찌 이웃 늙은이만 불러 함께 하리요

多迎長者盖頻傾(다영장자개빈경)   자주들 훌륭한 어른들 모셔 술잔 나누었도다

幽居眞味知吾事(유거진미지오사)   그윽히 은둔하는 진미를 오직 당신의 일로 삼고

末路浮名莫彼爭(말로부명막피쟁)   말로(末路)의 헛된 이름 다투지 않았도다

倒載幾逢池上醉(도재기봉지상취)   연못 위에 취하여 넘어지기 몇 번인가

臨杯還愧政無淸(임배환괴정무청)   잔 들면 다시금 부끄러워 정말 맑은 마음 아닐세

 

 

 

정자를 지은 김유(金綏)의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사대부로는 드물게 필사본 요리서로,

수운(需雲)‘격조를 지닌 음식 문화’를 잡방(雜方)은 ‘여러 가지 방법’을 뜻하여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의미하며,

술 만드는 방법, 음식 만드는 방법 등을 정리하여 기록한 2권 1책의 한문 필사본으로 모두 121가지의 조리법이 있어,

조선 초기의 식생활과 조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의 여러 요리서에 나오는 요리법을 다양하게 수록하였는데,

단순히 베낀 것이 아니라 각각 나름대로의 기술을 더하고,

시중에 나돌고 있는 속방(俗方)도 수록하면서 양반 집안에서 일상적으로 활용하던 토착화된 조리법도 기록 하였습니다.

 

 

 

탁청정 옆에는 낙운정(洛雲亭)이 자리하고 있어,

원래 산남정(山南亭)으로 부르던 낙운정은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의 아들인 김부인(金富仁,1512~1584)이 세운 정자로,

중년에 퇴락한 것을 중건하여 낙운정(洛雲亭)이라 바꾸어 불렀다고 하며,

 

 

 

정면 4칸 측면2칸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3면에 마루를 두고 가운데 2칸의 방을 들여 호남지역의 정자의 구성과 닮아 있으며,

 

 

 

낙운정(洛雲亭)의 현판이며,

 

 

 

낙운정기(洛雲亭記)의 기문(記文) 편액이 있으며,

 

 

 

낙운정(洛雲亭)의 옛명칭인 산남정(山南亭)을 세운 김부인(金富仁,1512~1584)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영(伯榮), 호는 산남(山南)으로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의 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두 번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문과에 실패하고,

1549년(명종 4) 무과에 장원하여,

낙안군수·호조정랑·창성부사·통정에 승진, 진주목사, 정주목사 이조좌랑·경상좌도병마절도사·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김부인(金富仁)은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빈강청(賓講廳)에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막힘없이 통해(通解)하여 그의 문명이 더욱 드러났으며,

창성부사로 있을 때 병마절도사 김수문(金秀文)과 함께 서해평(西海坪) 정벌에 공을 세웠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경학(經學)에 힘쓰면서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석보다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연구의 토대로 삼았으며,

자경편(自警編)을 저술하여 실천을 위주로 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저서로는 산남집(山南集)이 있습니다.

 

 

 

경북 안동의 군자마을 오천유적지에서 찾은 탁청정(濯淸亭)과 낙운정(洛雲亭)으로,

탁청정이 남성적인 웅장함이 있다면 낙운정은 여성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어 곁에 있으면 어룰리는 짝이 되는듯 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정자로 광산김씨(光山金氏 ) 탁청정공파 종택(安東 光山金氏 濯淸亭公派 宗宅)에 딸린 정자,

탁청정(濯淸亭)과 낙운정(洛雲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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