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을 여행 하면서,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방춘정(芳春亭)을 찾았습니다.

 

해남 방춘정(海南 芳春亭)은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09호로 지정 되었으며,

 

 

 

방춘정(芳春亭) 입구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순천김씨 삼상 사적비(順天金氏 三相 史蹟碑)가 있고,

 

 

 

문간채를 들어서면 정자라고 하기엔 다소 복잡해 보이는 건물이 들어오고,

 

 

 

마당에서 보이는 맞배지붕의 7칸으로 되어있는 대문채로,

창고와 방들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방춘정(芳春亭)은 1871년(고종 8) 귤암(橘岩) 김정순(金鼎淳)과 김문익(金文翼)이 주도하여 다시 지은,

순천김씨((順天金氏) 문중의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강학소(講學所)로,

1950년 한국동란이 일어나 수복 후 마을이 거의 불에 탔던 때 방춘서원 강당은 무사했지만 많은 서책 등은 소실 되었고,

김찬수씨를 비롯 후손들이 강당을 개축하고 방춘정(芳春亭)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평탄한 지형에 반북방향을 중심축으로 하여 문간채를 지나 방춘정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방춘정(芳春亭)은 팔작지붕의 단층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나,

양 측면에 부섭지붕을 들이고 그 아래에 폭이 좁은 툇간을 1칸씩 덧붙여 정면이 5칸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

평면구성은 맨 오른쪽에 2개의 방이 있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인데,

대청은 3면을 개방시켜 일반적인 사당 부속건물과는 달리 정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방춘정(芳春亭)의 왼쪽은 방을 들인 옆에 부섭지붕을 달아,

앞에 마루를 내고 1칸의 방을 들였으며,

 

 

 

삼상사(三相祠)의 현판이 보이는 오른쪽은 마루인데 역시 부섭을 달아 마루를 두었으며,

방춘정의 바깥쪽 원주는 초석위에 둥글게 깍아 세운 화강암과 나무기둥으로 연결되어 있어 눈길이 갑니다.

 

 

 

방춘정(芳春亭)의 현판이며,

 

 

 

방춘서원(芳春書院)의 현판도 볼수있어 방춘정이 대원군의 서원철폐이후 서원으로 세울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엿볼수 있으며,

네글자중 마지막의 원(院) 글자가 따로이 위로 올라가 있어 연유가 있는듯 하며,

 

 

 

삼상사(三相祠)의 현판도 있어 사당을 의미하는 사(祠)의 의미가 역시 서원을 지향했던 옛모습으로 보입니다.

 

 

 

전면의 마루아래에는 온돌발에 불을 넣는 아궁이가 있고,

 

 

 

머리숙여 마루 하부의 구조도 들여다 봅니다.

 

 

 

기단은 4단의 다듬돌 바른층 쌓기 형식이며 초석(礎石)은 커다란 자연석을 사용한 덤벙주초이며,

화강암 기단과 마루로 오르는 곳에는 돌계단을 두었고,

 

 

 

기둥은 원통형의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측면의 양 우주와 후면 좌측 끝 기둥만을 원형석주로 받치고 있고,

기둥머리부분은 도리방향으로 창방(昌枋)을 결구시켰으며 주간마다 소루(小累)를 3구씩 배치하여 장식 하였으며,

공포는 단촐하게 쇠서와 주두만을 두었는데 보 방향의 살미는 기둥머리에 끼웠고 대량 밑으로 초각된 보아지를 두었고,

 

 

 

온돌방에서 마루쪽은 문짝 네개를 잇달아 달린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는데,

접어 들어서 열수 있게 해두어 마루와 방이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수 있게 해두어,

서원의 강학공간 이라기 보다 정자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가구(架構)는 5량(樑) 구조로 대들보 위에는 주두모양으로 된 받침을 두어 동자주를 대신 놓고 그 위에 종량(宗樑)을 걸쳤으며,

종량 중앙에는 삼각형의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게 했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합각밑면만은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습니다.

 

 

 

방춘정(芳春亭)의 온돌방은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 보지 못하고,

 

 

 

마루에는 시판(詩板)과 기문(記文)들이 올려져 있어,

 

 

 

방춘정(芳春亭)에는 2기의 삼상사기(三相祠記)와 1기의 방춘서원기(芳春書院記)의 기문(記文)과,

현액시(懸額詩)가 6기등 여러 편액이 올려져 있습니다.

 

 

 

방춘서원(芳春書院)을 지향했던 이곳에 배향되어 있는 월담(月潭) 김승주(金承霔,1354∼1424)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초명은 을보(乙寶) 였으나,

한발이 심해 그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마침 많은 비가 오게되어 이름을 승주라 고쳤다고 하며,

1380년(우왕 6)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로 관직에 들어선 뒤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거쳐,

1389년(창왕 1) 풍주수령으로 임명되어 풍주 연해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조선이 건국되자 1393년(태조 2)에 전중경(殿中卿)에 오르고, 이어서 이성만호(泥城萬戶)가 되었으며,

1394년에 의흥삼군부첨절제사(義興三軍府僉節制使)가 되었다가 그 해 형조전서로 전임 하였고,

1396년 동북면청해도안무겸찰리사(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로 나가 야인 진압에 공을 세웠고,

호조전서·이조전서·중추원부사·경상도병마절제사·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습니다.

1400년(정종 2)에 좌군총제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 졌으며,

태종 초에 강계만호에 이어 공조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냈고 1406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7년에 동북면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도순문찰리사 등을 지냈고 1409년에 야인이 경원(慶源)에 침입하자 왕명을 받고 나가 이를 격퇴 하였고,

이듬해 참찬의정부사에 이어 1413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제사·평양부윤을 지냈으며,

1414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이듬해인 1415년에 평양군(平陽君)으로 개봉되었으며 판중군도총제(判中軍都摠制)가 되었고,

1417년(태종 17) 평양부원군에 가봉(加封)되고 이어 1423년(세종 5년) 좌의정에 올랐다가 이듬해71세로 졸하였으며 시호는 양경(襄景) 입니다.

 

 

 

방춘정(芳春亭) 뒤에는 사당이 있어,

1698년(숙종 24) 절제(節齊) 김종서 (金宗瑞)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가묘에 봉안 하다가,

1784년(정조 8) 월담(月潭) 김승주(金承霔 1354~1424), 북저(北渚) 김유(金瑬 : 1571~1648)를 합향하였고

1808년(순조 8)에 삼상사(三相祠)라는 이름으로 사우를 건립 하였고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인하여 훼철 되었다가,

1901년에 향내유림의 발의로 설단하고,

1903년에 남은(南隱) 김효우(金孝友)를 추배하였으며 1919년 구지에 사우를 중건하면서 지명을 따라 방춘서원이라 칭 하였습니다.

 

 

 

이곳에 배향된 절제(節齊) 김종서(金宗瑞,1383∼1453)는 조선초기의 문관이자 무장으로,

1405년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1419년 (세종 1년) 시간원우정언이 되었고,

고려사 편찬 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세종실록의 총제관을 거쳐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으며,

그 후 문종의 유명으로 단종을 옹위하던 재상 가운데 지용을 겸비한 명신으로서,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제1차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1903년 배향된 순천김씨 남은(南隱) 김효우(金孝友)는,

1450년(세종 32) 19세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과 덕망이 탁월하여 임금의 총애가 깊었으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낙남하여 정착하게 된 곳이 흑석산 아래 이곳 청계(淸溪)라고 하며,

이곳에서 마의초식(麻衣草食)하면서 우물을 파고 소나무와 동백 등을 심으며 후학에 전념 하였다고 합니다.

 

 

 

1784년(정조 8)에 배행된 북저(北渚) 김유(金瑬 : 1571~1648)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이며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 되었고,

내,외의 여러 직책을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때에 공을 세워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 졌으며,

이듬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 하였고,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킨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 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영의정으로서 최명길 등과 더불어 화의를 주장하여 삼전도에서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 되었으며,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했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 하였고,

시문에 뛰어나 공경(公卿)의 비문을 많이 썼으며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하며 시호는 문충(文忠) 입니다.

 

 

 

형식은 정자 이지만 훼철된 서원을 지향 하였던,

조선 말기 서원의 시대적 상황을 볼수 있는 순천김씨(順天金氏)의 정자인,

전남 해남의 방춘정(芳春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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