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를 여행 하면서,

구례의 지리산 사찰중 하나로 승탑(僧塔)의 사찰로도 불리는,

구례 지리산의 사찰인 연곡사(鷰谷寺)를 찾았습니다.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인 일주문(一柱門)으로 1995년 세워 졌으며,

연곡사(鷰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 하였으며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 였으며,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 하였고,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 되기도 하였습니다.

 

 

 

연곡사(鷰谷寺)의 배치를 알수있는 안내문의 그림으로,

구례는 5개의 시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을 품고 있는 고장 중 하나로,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는 화엄사를 비롯해 천은사, 문수사, 연곡사 등 깊은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찰이 남아 있어,

산사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볼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며 구례 연곡사(鷰谷寺)는 작은 사찰로 보이지만 국보 2점, 보물 4점을 보유한 지리산 절집 입니다.

 

 

 

근자에 다시 중건한듯 보이는 천왕문(天王門)이며,

구한말인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 시켰는데,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 하였고 연곡사(鷰谷寺)는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했으며,

그 후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새 대웅전을 준공 하였고 1983년에는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 하였으며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메말라 있는 영지(影池)로 보이는 연못이 있어,

장방형의 연못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있어 유교적 우주론의 반영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습이 보여,

방지원도는 하늘은 둥굴고 땅은 모났다는 도교사상으로 5,000년이 넘는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고유의 사상 이기도 합니다.

 

 

 

연못의 서편에는 높이 6m의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求禮鷰谷寺三層石塔)"이 있어,

보물 제151호로 지정된 연곡사 3층석탑은 연곡사 법당 남쪽에 서 있는 석탑으로 3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며,

 

 

 

구례 연곡사 삼층석탑(求禮鷰谷寺三層石塔)은,

 

기단의 각 층은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맨 윗기단이 넓은 데 비해 탑신부가 급격하게 줄어 들었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옛날 전당이 있던 곳이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천왕문을 지나면 근자에 서운것으로 보이는 중층의 누각인 "삼홍루(三紅樓)"가 있어,

강당 건물인 삼홍루(三紅樓)는 정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누각의 현판은 누각를 들어서면 보이는데,

삼홍루(三紅樓)의 현판은 서예가 이종선(李鍾宣)의 글씨이며,

 

 

 

삼홍루를 들어서면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마주하게 되며,

사찰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합니다.

 

 

 

산문과 천왕문 그리고 삼홍루와 본당인 대적광전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찰의 배치형식을 볼수 있습니다.

 

 

 

1981년에 다시세운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일반적으로 대적광전을 화엄전(華嚴殿)으로 불리기도 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근자에 세웠지만 웅장한 규모이며,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본당으로,

청정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로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에서 설법 한다고 하며,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인 법신불(法身佛)로,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의미 입니다.

 

 

 

대적광전의 동편에는 죽은 사람이 간다는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인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하고 있어,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전각으로,

 

 

 

명부전(冥府殿)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시왕을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으로도 불리며,

법당의 주불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좌우에 명부시왕(冥府十王) 상들을 안치하여 두고 있어,

시왕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저지른 죄를 심판한다는 열명의 왕들로,

 

 

 

사람이 죽어서 명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재는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지내는 49재,

또는 죽은 지 100일에 지내는 백재(百齋)와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小祥)과 대상(大祥)까지 모두 열번인데,

이 열 번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의 시왕 각각에게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을 받을 때마다 재를 올린다는 명부시왕신앙에 의한 것으로,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된 불교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대적광전의 서편에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인 관음전(觀音殿)이 자리하고 있어,

 

 

 

관음전에는 한글의 "관음전" 편액이 올려져 있고,

 

 

 

관음전의 주불인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보는 이의 정신 수준에 따라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로,

"모든 곳을 살피는 분"이나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고 있습니다.

 

 

 

대적광전 뒤편에 승탑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동편에 삼성각의 전각이 있어,

 

 

 

정면 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의 삼성각(三聖閣)으로,

삼성각은 우리나라에서만 볼수있는 불교 전각으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인 "삼성각(三聖閣)"으로,

 

 

 

산신각은 산신령을 모신 산령각으로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 하며,

 

 

 

연곡사의 삼성각(三聖閣)에서는 동자와 있는 산신령과,

호랑이가 있는 산신령의 모습을 찾을수 있습니다.

 

 

 

승탑을 보기위해 대적광전의 뒤편으로 오르며,

연곡사의 승탑들은 대적광전의 뒤편과 대적광전의 서편에 자리해 있어 차례로 찾아 봅니다.

 

 

 

보물 제153호인 동 승탑비 (東僧塔碑)로,

"구례 연곡사 동 승탑비 (求禮鷰谷寺東僧塔碑)"는 비신(碑身)은 임진왜란때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어,

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하고 귀부의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 구름무늬가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었으며,

그 윗면 주위로는 복판(覆瓣)의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비좌의 측면에 고부조로 구름무늬를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합니다.

 

 

 

보물 제152호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는 귀부 높이 112㎝ 이수 높이 75㎝의 크기로,

 

 

 

조각 수법은 당대의 탑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龜頭)나 비좌(碑座) 4면에 새긴 안상(眼象)과 귀꽃이 특색이며,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현각왕사비명玄覺王師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어,

비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에 수염을 가진 용머리를 하고 있고,

 

 

 

등 중앙에 비를 꽂는 연결부분인 비좌에 안상과 꽃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연곡사는 545년(신라 진평왕 6)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는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玄覺禪師)를 기리기 위해 979년(경종 4)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비신(碑身)은 임진왜란 때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습니다.

 

 

 

국보 제53호로 지정된 구례 연곡사 동 승탑(求禮鷰谷寺東僧塔)으로,

높이 300cm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가 모두 8각으로 된 8각원당형 부도로,

도선국사의 유골을 안치한 묘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하대석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에는 운룡(雲龍)을 새기고 윗부분에는 사자(獅子)를 조각 했으며,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무기를 쥐고 있는 팔부신장상이 표현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단부에 팔부신장상이 나타나는 것은 9세기경의 통일신라시대 부도에서 보이는 특징이나,

시대가 내려가면서 팔부신장 대신에 주악천인상과 공양합장상으로 변했으며,

상대석에는 반원형의 앙련(仰蓮)을 조각하고 윗면에는 높은 탑신 받침대가 있는데 각 모서리마다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가릉빈가를 1구씩 배치 하였고 탑신의 각 면에는 문비·삼족(三足)과 뚜껑이 있는 향완, 무장형(武將形)의 사천왕상 등이 얕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에는 목조건축의 2중 서까래와 기왓골이 정교하게 모각되어 있으며 추녀의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주며,

상륜부는 날개를 편 봉황·앙화(仰花)·보륜으로 이루어 졌으며 각 부의 구조와 크기가 서로 비슷하여 안정된 비례감을 보여주며,

각 면에 나타나는 조각상이나 장식문양이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처리되어 있어 연곡사에 있는 3개의 부도 중에서 가장 조각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조성연대는 8각원당형 부도가 유행하기 시작한 신라말 또는 고려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동 승탑은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동 승탑 뒤편에는 동백나무숲 아래 작은 비석이 있어,

구례군의 향토유적 제14호로 지정된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義兵將高光洵殉節碑)'로,

 

 

 

구한말 일본군과 맞서다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高光洵,1848~1907)의 순절비(殉節碑)로, 

1907년 항일 의병항쟁을 위해 연곡사에 집결하였다가,

일본군의 기습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 고광순의 항일 정신이 깃든 곳으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髙敬命,1533~1592)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순절비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윗쪽으로 조금 오르면,

 

 

 

보물 제154호로 지정된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求禮鷰谷寺逍遙大師塔)"이 자리해 있어,

높이 360cm 크기의 부도는 탑신석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과 "순치6년경인'(順治六年庚寅)"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소요대사가 죽은 다음해인 1650년(효종 1)에 건립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8각원당형 부도를 기본적으로 따른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고,

하대석은 2단 받침으로 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반면 하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윗면에 탑신을 중심으로 몰딩이 있고 그 주위로 홈이 깊게 파여 있으며 중대석은 원통형으로 위·아래 연꽃이 대칭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8각의 상대석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둥근 형태의 굄이 있고,

탑신에는 7구의 신장상과 1구의 문비가 양각되어 있는데 이 문비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와 같이 부도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행한 형식 이기도 합니다.

 

 

소요대사탑 주변에는 서로다른 모습의 부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설명문이 없어 내력을 알수 없으며,

 

 

 

설명문이 없는 부도들은 조선조 연곡사와 인연이 있었던 큰스님의 부도로 여겨지는데,

 

 

 

소요대사탑 주변에 있는 3기의 부도들을 함께 돌아보는 것으로 연곡사에서 내려 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에 의해 창건되어,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로 명망높은 큰스님들이 자리했던 곳이였으나,

계속된 전란의 영향으로 폐사를 거듭 하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재흥을 보게된 사찰로,

승탑의 사찰로 이름난 전남 구례의 지리산 사찰인 연곡사(鷰谷寺)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