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건축물인,

광주 양과동정(良瓜洞亭)을 찾았습니다.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된 "양과동정(良瓜洞亭)"으로,

 

 

 

양과동정(良瓜洞亭)은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墅) 또는 간원대(諫院臺) 라고도 하는데,

양과동정 출신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배출되어 여기에서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고 해서 "간원대(諫院臺)"라고도 하며,

1418년 태동한 "광주향약좌목"의 영향을 받아 동약(洞約)과 향약(鄕約) 등의 시행처로도 사용되었으며,

보통 정자와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지방자치를 위한 회합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또한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에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며,

동약(洞約)이나 향약(鄕約)의 시행처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동정(洞亭)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자 안쪽에는 정면 5칸 측면2칸 규모로 팔작지붕의 건물이 한채 있어,

양과동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향약을 연구하는 "양과동 향약관(良瓜洞鄕約館)"으로,

 

 

 

양과동 향약관(良瓜洞鄕約館)의 편액은 광주 광역시장 강운태의 글씨라 하며,

 

 

 

향약관 앞에는 중앙에 "양과동정 공덕비"가 있고,

"양과동정 공덕비 건립 헌성비"와 "양과동 향약 좌목비"가 좌우에 나란히 자리해 있습니다.

 

 

 

양과동정(良瓜洞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방은 들이지 않고 마루만 있는 정자로,

기단은 바른층 막돌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고서 원형기둥을 세웠고,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양과동정(良瓜洞亭)은 서기 600년대 중반 무렵 삼한 또는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하여,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나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양과동정(良瓜洞亭)의 우물마루에 오르면 앞, 뒤는 완전하게 열려 있고,

좌우에는 낮은 난간을 두었슴이 보이고,

 

 

 

정자의 현판은 처마 안쪽에 올려져 있어,

 

 

 

양과동정(良瓜洞亭)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의 글씨이며,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87 성종18~1547 명종 2)가 비운의 정권찬탈의 희생양으로 사헌부대사헌 재직중 윤원형·이기 등의 미움을 받아,

이조 참판(吏曹參判) 재직중에 1543년(중종 38년) 전라도 관찰사. 광주관찰사로 좌천되어 지낼 때 이곳에 들려 읊은 시판(詩板)으로,

柳谷多奇勝 眼明孤草亭  유곡(幽谷)이란 이 지역에 좋은 경치 허다하니 외로운 한 초정(草亭)이 눈앞에 선명하네

溪流沙舊白 雨霽峀新靑  흐르는 시냇물에 흰 모래 새로웁고 / 비 개인 높은 산은 그 빛이 더 푸르구나

夜坐邀銀闕 春遊臥玉甁  밤마다 홀로 앉아 밝은 달 맞이하고 / 봄철에 즐겨 놀며 술병을 비웠도다

年年同社會 淳朴筆難形  해마다 함께 모여 이처럼 화목하니 / 순박한 이 풍속을 그 누가 형용하리까 

 

 

 

마루 위에는 "양과동정중수기(良瓜洞亭重修記)"를 비롯하여,

동정입의서(洞亭立議序)와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亭), 박광옥(朴光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등 여러 시문(詩文)과 기문(記文)들이 편액(扁額)되어 있으며,

 

 

 

양과동정(良瓜洞亭)은 목재의 모양이나 기둥 상부에 "S"자형의 헛첨차만을 이룬 단순한 형태는,

공포(栱包)완성 바로 직전의 형태로 이 정자가 오래된 구조물임을 알 수 있으며,

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이며 암막새는 거북선 모양 입니다.

 

 

 

양과동정(良瓜洞亭)의 마루에서는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을 볼수 있어,

 

 

 

호남의 의병장이자 시인였던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의 시(詩)로,

問柳前川過 亭皐憩晩凉   버드나무 찾으려고 앞 개울을 지나면서/ 정자 언덕 서늘하여 잠깐동안 쉬었도다

黃雲村欲麥 白水野分秧   마을앞의 보리 색깔 황운(黃雲)처럼 익어있고 / 논바닥에 가득한 물 모내기가 한창이네

小雨園蔬嫩 輕風市酒香   하염없는 가랑비에 밭 나물이 돋아나고/ 불어오는 가는 바람 술 향기가 풍겨오네

自今來往熟 鷄犬亦相忘   이제부터 오고 가며 그 얼굴이 익숙하니 / 닭과 개도 나를 알아 경계함을 잊었도다

 

 

 

광주 서창동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으로 전라도사, 충청도사, 영광군수를 지내고 64세에 성균관 사예 겸 지제교에 부임하였다가 사임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고령으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고경명와 의병과 군량미를 모우며 참여했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이 자주 별서에 오르고 시주를 나눴는데,

永日牽閒興 披襟坐小亭  하릴없는 긴 여름에 맑은 홍취 한가하니 옷깃 단추 풀으면서 작은 정자 앉았도다

林深暑氣薄 雨足稻田靑  푸른 숲이 울창하니 찌는 더위 엷어지고 / 내린 비가 흡족하니 나락 빛이 푸르르네

少長分蒲席 悲歡付酒甁  젊은이와 늙은이는 돗자리를 나눠 앉고 /슬픈 마음 기쁜 생각 술동이에 맡겼도다

名場多作指 野外欲潛形  이름있는 이 장소를 너나없이 가리키니 /들녘 밖의 여러 풍물 그 모습을 감추었네

 

 

 

양과동정(良瓜洞亭)은 한때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墅)로도 사용 되었는데,

자신의 정자를 짓지 않고 빌려 지낸 소박함도 보이는 대목으로,

고경명(高景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고,

가장 먼저 광주(光州) 전남의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하였으며 그의 나이 60세 였습니다.

 

 

 

지금 정자의 건립연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서기 600년대 중반 무렵에 처음 건립 되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동약(洞約)이나 향약(鄕約)의 시행처로 지역민들의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 되었고,

임진왜란의 의병장 고경명(高景命)의 유허가 있는 곳으로,

광주의 정자 문화재 "양과동정(良瓜洞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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