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의 무덤인,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을 찾았습니다.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은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길건너에 주차장이 있어 주차는 수월한 편이며,

 

 

 

홍살문과 삼문을 지나면 왕비릉이 보이는데,

수로왕릉(首露王陵)에 비해 권역도 작은편이며 외문과 중문등의 문도 별도로 없습니다.

 

 

 

능(陵)으로 오르는 오른편에는 비각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파사석탑(婆娑石塔)"으로,

한문음으로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고 표기하나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파사(婆娑)는 유체(有諦)로서 일체의 지혜가 현증(現證)한다는 의미 이며, 

이 탑은 파신(波申)을 눌러 파도를 진정 시키므로 일명 "진풍탑(鎭風塔)" 이라고도 합니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보호를 위한 파사각((婆娑閣)의 현판이며,

 

 

 

현재 남아 있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은,

4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높직한 굄대가 있어 그 위에 여러 개의 부재(현재는 6석임)를 받고 있는데,

각 부재의 측면과 하면 등에서 다양한 조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한 편인데,

파사석탑(婆娑石塔)은 파도를 진정시키는 진풍탑(鎭風塔)으로도 불렸는데,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나 고기잡이를 가면 파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고,

몰래 조금씩 떼어가 망가뜨렸기 때문에 사각형의 돌이 마치 원형처럼 망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사석탑(婆娑石塔)에 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3 탑상편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金官城婆娑石塔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어,

"금관성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邑)이 금관국으로 되어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동쪽으로 오려고 하다가 파신(波神)의 노여움에 막혀서 할수없이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 남쪽 물가에 와서 닿았는데,

비범(緋帆 : 붉은색의 배)·천기(?旗 : 붉은 색의 기)·주옥(珠玉)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주포(主浦)라 한다. …(중략)…

탑은 사면으로 모가 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라는 기록이 있고,

 

 

 

탑의 부재(部材)는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어,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하여 말라버렸다고 하는,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사석탑(婆娑石塔)은 호계사에 있던 탑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부사로 있던 정현석(鄭顯奭)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 ”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으로 허황옥(許黃玉, 32년 ~ 189년)은 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으로,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모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 아유타국(阿踰陁國,월지국)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는데,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고,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 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라는 기록으로,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남방(南方)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으며,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 입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무덤의 밑둘레에는 특별한 시설은 없으며,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방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고,

이 무덤은 평지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김해 구산동 고분군과 인접해 있어 무덤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土壙墓] 또는 돌방무덤[石室墓]일 가능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혼유석(魂遊石)을 놓았고 아울러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는데,

"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지릉)"의 글자가 새겨져 있어 1647년(인조 25)에 세웠습니다.

 

 

 

무덤의 지름은 약 16m, 높이는 약 5m. 능은 대형의 원형봉토분 으로,

허황옥(許黃玉)은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로서,

수로왕 7년인 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비가 되고 왕자 열 명을 두었는데,

그 중 두 아들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대를 잇게 하였으며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왕비릉에서 내려오다 보면 파사석탑아래 동편에 부속건물들이 있어,

 

 

 

문을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고직사(庫直舍)로,

관리하는 사람들의 살림집인 고직사(庫直舍)는 능을 수호하던 고지기(관리인)가 거처하던 곳이며,

 

 

 

윗쪽으로 계단이 있고 솟을대문인 "경종문(敬宗門)"이 있어,

 

 

 

경종문을 들어서면 숭보재(崇報齋)가 자리하고 있어,

숭보재는 능에 딸린 부속건물로 제사를 위한 재실의 건물로 여겨 집니다.

 

 

 

아유타국(阿踰陁國,월지국)의 공주로 바다를 건너 국제 결혼을 하여,

일찌기 다문화를 이룬 사례로 "아유타국"의 소재에 대한 여러가지의 설이 분분하나,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는 단서를 남겼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모,

허황후(許皇后)의 능, 김해의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