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무덤인 경순왕릉(敬順王陵)을 찾았습니다.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2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0여년 전에 이곳 경순왕릉(敬順王陵)을 찾은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없었던 주차장도 정비가 되어 있고 진입로도 좋아져 많이 변해있어 새로이 정비를 해둔듯 합니다.

 

 

 

입구의 안내문에서 볼수있는 경순왕릉(敬順王陵)의 배치도 이며,

경순왕릉(敬順王陵)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 이기도 합니다.

 

 

 

안내문에 있는 능표(陵表)의 탁본으로 능표는 묘(墓) 앞에 세운 비석(碑石)을 말하며 내용을 살펴보면,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왕신라제오십육왕후당천성이년무자대경애왕)

而立淸泰乙未遜國干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이립청태을미손국우고려송태평흥국무인려경)

宗三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干長湍古府(종삼년사월사일훙시경순이왕례장우장단고부)

南八里癸坐之原(남팔리계좌지원)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지행순덕영모의열성상이십삼년정묘월이개정)

왕(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으로 후당 천성 2년 무자에 경애 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 을미년(935년)에 나라를 고려에 넘겨 주셨다.

송 태평흫국 무인년, 즉 고려 경종 3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경순이라 하고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년(1747년) 월일에 다시 세우다.

 

 

 

10여년전에 왔을 때에는 앞에 주차장이 없어 왕릉앞까지 차량이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걸어서 들어가야하며,

길의 오른쪽은 예나 지금이나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어,

 

 

 

철망 군데 군데에 "지뢰"라는 경고의 글자가 보이는데,

경순왕릉(敬順王陵)은 민통선지역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경순왕릉입구 군초소에서 신원을 확인한 다음 초병을 대동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들어올수 있지만 북한의 도발이 있거나 군사위협이 있을 경우 출입이 전면 통제되고 있는 곳으로,

이곳의 철책선은 군인들이 철조망을 지키는 GOP에 해당하고 이곳에서 북으로 2km 지점은 군사분계선인 휴전선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200m가 채되지 않는 거리를 걸으면 건물과 왕릉이 있어,

 

 

 

안내문에는 재실로 나와있는데,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재실로 건물의 모양으로 보아,

재실보다는 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 하는곳인 전사청(典祀廳)에 가까워 보이며,

 

 

 

낮은 구릉위에 왕릉이 보이고 아래에는 경순왕릉 추정 신도비각(敬順王陵 推定 神道碑閣)이 있어,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들은 대부분 평지에 있는데 반해 경순왕릉(敬順王陵)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어서 고려의 양식을 받은듯 보이고,

 

 

 

비각 안에는 옛부터 경순왕릉 비로 전해오고 있는 비가 한기 있어,

 비문의 내용은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으며,

다만 몇 글자 정도가 남아있는데 이 비가 경순왕릉 비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인데,

당시에 세운 비석은 임진왜란 이후 경순왕릉의 관리가 소홀해지자 방치되다가 실전(失傳)되어,

고랑포마을 사람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며 방치되어 오던 비를,

1973년 어느 중대장에 의해 발견 되어 고랑포 초등학교에 가져 놓았다가 1986년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습니다.

 

 

 

능역(陵域)과 주변의 모습으로,

능을 제외하고는 주위는 숲으로 가득차 있는 비무장 지대로 휴전 후 지금까지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않은 원시림이기도 합니다.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며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로,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국가가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여서,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 하였으며 귀부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태조 왕건 으로부터 개성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 되기도 하였으며,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순왕릉(敬順王陵)의 무덤봉분 지름은 7m이며 높이는 약 3m로,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으며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통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는데 앞서 인용한 안내문의 비문탁본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능표(陵表)인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의 비석으로,

이곳도 6.25전쟁때 격전지 였는지 비석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후기 영조 때인 1747년에 그의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묘비석을 발견하여 다시 정비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을 비롯한 능의 석물(石物)들은,

1747년(영조 23)에 능표(陵表)를 세우면서 정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능(陵) 뒤의 곡장(曲墻)은 멸실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보수를 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보알려져 있는데,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曲墻)은 설치되지 않았는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순왕(敬順王)이 승하하자 신라(新羅)의 유민(遺民)들은 경주로 모시기를 원했으며 경순왕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었기에,

개성에서 왕의 운구가 출발하자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혹여나 신라 유민들이 동요하거나 민중 봉기가 있을까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의 구(柩)는 도성(개성)에서 백리밖을 나갈수 없다"는 령을 내려 장남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성거산에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셨다고 합니다.

 

 

 

경주 대능원에 있는 황남대총의 경우 높이가 23m이고 경순왕릉은 3m이며,

황남대총의 둘레가 120m인데 반해 이곳은 겨우 7m로 경순왕릉이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들에 비해 아주 작게 조성 되어있어, 

천년을 이어온 왕국인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경주에서 천리가 떨어진 경기도 연천에 작은 왕릉으로 남아서  나라를 잃어버린 망국의 왕릉으로 남게 되었으며,

인근에 있는 남한에 얼마 없는 고구려의 유적 "호로고루"와 함께 돌아볼만한 곳으로,

경기도 연천의 유적, 경순왕릉(敬順王陵) 방문기 입니다.

 

인근에 있는 "호로고루"에 관한 자료는 아래에서 찾을실수 있습니다.

자연이 제공한 천혜의 요새, 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_1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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