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당 터,

연천 숭의전지(漣川崇義殿址)를 찾았습니다.

 

연천 숭의전지(漣川崇義殿址)는 사적 제22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숭의전(崇義殿)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 앞에는 왕건이 오가면서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이 있어,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이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제공하고 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숭의전 자리에 있었던 앙암사(仰巖寺)라는 절에서 하루밤 묵으며 갔다고 하며,

앙암사는 철원과 개성의 중간지점이며 자주 머물며 기도하던 왕건의 원찰(願刹)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으로 전합니다.

 

 

 

숭의전(崇義殿)으로 가는길은 완만한 경사로 그리 멀지 않으며,

 

 

 

숭의전(崇義殿) 입구에는,

담장 옆에 8백년 되었다는 노거수 느티나무가 있고 나무아래에 단을 설치해두어 제례때 의미가 있는듯 하며,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로,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며,

 

 

 

조선시대에는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셨고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를 모셨으며,

경주의 숭덕전(崇德殿)은 신라의 시조를 모셨고 충청남도 직산의 숭렬전(崇烈殿)은 백제의 온조왕을 모셨으며,

숭의전에는 고려 태조 및 혜종·정종·광종·경종·목종·현종을 제사 지냈습니다.

 

 

 

숭의전 앞에는 수령 약 550년의 높이 20m 둘레는 4.7m의 노거수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이 나무는 조선 문종 2년(1452)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해 오는데,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면서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치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있고 까마귀가 모여들면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안내문에서 숭의전(崇義殿)의 건물배치를 먼저 살펴보면,

현재 재건된 건물로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을 비롯하여,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이 있고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인 이안청(移安廳)이 있으며,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 하는 전사청(典祀廳)의 건물이 있고,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재실인 앙암재(仰巖齋) 등의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숭의전(崇義殿)의 오른편에 있는 앙암재(仰巖齋)로 먼저 들어 가도록 합니다.

 

 

 

앙암재(仰巖齋)는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으로,

재실로도 불리는 재사(齋舍)에 해당하는 건물로 보이고,

 

 

 

앙암재(仰巖齋)는 정면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마루 중앙에 있는 앙암재(仰巖齋)의 현판이며,

 

 

 

앙암재(仰巖齋)는 방앞에 반칸의 긴 쪽마루를 두었고,

 

 

 

3칸으로 3개의 방앞에는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으며,

 

 

 

열려있는 왼쪽이 방에는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王建)의 동상과 능의 사진이 있고,

장농에는 제례때 사용하는 제관들의 의복이 보관되어 있으며 문위에는 왕건(王建)의 어필(御筆) 복사본이 걸려 있어,

 

 

 

방문에 태조의 어필(御筆) 시(詩)를 다시 적어 두어,

所思 그리워 하는 바

東林送容處   동림은 손님을 배웅하는 곳

月出白猿啼   달 뜨자 흰 원숭이도 우네

笑別廬山遠  웃으며 이별하나 여산은 멀고머니

何煩過虎溪  호계 넘는 것을 어찌 번거롭다하랴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유덕양에게 써준 이태백(李太白)의 시(詩) 두편 중 한편으로,

이 시(詩)는 "동림사 스님과 작별함(別東林寺僧)"이라는 이백(李白)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앙암재의 동편에 낮은계단을 두고 협문이 있어,

 

 

 

협문을 지나면 제례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수를 준비하는 곳인 전사청(典祀廳)이 있어,

앙암재와 같이 전사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정전 건물과는 구분되는 담장이 둘려있고,

 

 

 

전사청(典祀廳)의 현판이며,

 

 

 

전사청을 지나면 다시 협문이 있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正殿)인 숭의전(崇義殿)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고려의 왕손들과 그 후예, 일족들인 왕씨(王氏)들은 몰살에 가까운 죽임을 당 하였는데,

이는 전대왕조의 저항이나 모반을 우려한 새 왕조의 과도한 숙청이었는데 조선왕조가 안정되기 시작한 태종이나 문종 대에 이르러서야,

탄압정책을 중지하고 일부 복권하거나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우대정책을 폈다고 하며,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측근들 처지에서는 자신들이 고려왕조를 온전히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고려왕실에 대한 처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에 즉위 후 반포한 교서를 통하여,

7남 방번과 사돈이 된 고려왕실의 후손 왕우(王瑀)를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고 마전군(지금의 연천군 미산면 일대) 일대를 하사하여,

고려 태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새로이 사당을 지은 것은 아니고,

마전면 아미산 아래 임진강 변에 위치한 앙암사(仰巖寺)라는 작은 절에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셔와 봉안하니,

아쉽고 급한 대로 고려 태조묘(高麗太祖廟)가 건립된 것인데,

앙암사는 왕건이 궁예의 수하 장수로 있으면서 도읍지 철원과 개성을 오가는 중간에 있어 자주 들렀으며 때로는 쉬어가던 곳으로,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시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원찰(願刹)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하며,

 

 

 

이렇게 조선 개국 이후에 어렵사리 고려 태조 사당을 마련하고 후손을 지정하여 관리하도록 함에 따라 고려왕실의 사당이 유지되는가 싶었으나,

귀의군 왕우와 그 아들들로 이어지던 제향은 더는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지 그만 끊겨 버렸으며 더는 살피고 돌보는 손길 없이 쇠락해져,

사당이 빗물에 무너질 정도로 관리되지 못하게 되어 조정에서는 사당에 제사하고 관리할 봉사손(奉祀孫)을 찾으려 했고,

마침내 1452년(문종 2년) 공주에서 성(姓)을 감추고 숨어 살던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우지를 찾아 왕순례(王循禮)로 개명토록 하고,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제사를 잇게 하였고 주변에 터를 살피고 사당을 고쳐 새로이 건립하였으며 문종이 편액을 내렸다고 하니,

비로소 지금의 숭의전(崇義殿)이 세워진 것이라 합니다.

 

 

 

숭의전(崇義殿)의 현판으로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는 의미라 하며,

 

 

 

숭의전(崇義殿)과 관련한 또다른 이야기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 후 고려왕족을 무참히 살해하던 중,

어느날 꿈에 왕건(王建)이 나타나 "그대의 후손들에게도 재액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질책을 하여,

잠을 깬 이성계가 왕씨 멸족의 영을 거두고 숭의전을 세우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기도 합니다.

 

 

 

숭의전의 왼쪽계단 아래에는 돌로된 조형물이 있어,

제를 지내고 제문을 사르는 곳으로 보여지며,

 

 

 

숭의전(崇義殿)의 기단으로 오르는 3개의 계단이 있는데,

중앙의 계단은 신도(神道)라 하여 전각에 모신 신(神)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표지가 있어,

중앙의 계단을 피하여 왼쪽의 계단으로 올라 봅니다.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崇義殿)에는,

중앙에는 태조 왕건(王建)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는데,

 

 

 

문은 닫혀 있으나 사진을 앞에 내어두어 위패와 영정을 볼수있게 해 두었고,

 

 

 

숭의전(崇義殿)의 좌우에는 태조 외 3분의 왕을 모시고 있어,

 

 

 

1397년(태조 6)에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 하였는데,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고 하며,

 

 

 

숭의전은 1605년(선조 38)과 1727년(영조 3)에 1789년(정조 13)에 이어 1868년(고종 5)과 1908년(순종 2) 등,

모두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 하였으며 1972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숭의 전 옆에는 이안청(移安廳)과 배신청(陪臣廳)의 건물이 있어,

 

 

 

왼쪽의 이안청(移安廳)은 정전을 청소하거나 공사 등으로 위패를 잠시 옮겨 모시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이안청(移安廳)의 현판이며,

 

 

 

이안청(移安廳)의 벽 안쪽에는,

1789년(정조 13년) 마전군수였던 한문홍(韓文洪, 1787~1790년 역임)이,

숭의전 수리를 마치고 옛 왕조의 영화와 쇠락 속에 담긴 무상함을 담아 잠두봉(蠶頭峰) 절벽 중간에 새겼다는,

칠언칠구의 시(詩)를 액자에 넣어 놓았습니다.

重作 崇義殿(중작 숭의전)  숭의전을 중수하고

麗祖祠宮四百秋(려조사궁사백추)  숭의전을 지은 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誰敎木石更新修(수교목석갱신수)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江山豈識興亡恨(강산개식흥망한)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오

依舊蠶頭出碧流(의구잠두출벽류)  의 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住歲傷心滿月秋(주세상심만월추)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如今爲郡廟宮修(여금위군묘궁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聖祖更乞麗牲石(성조갱걸려생석)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留與澄波萬古流(유여징파만고류)  아무도 숭의전은 징파강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

 

 

 

이안청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이 있어,

 

 

 

배신청(陪臣廳)의 현판 이며,

 

 

 

1451년(문종 1)에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토록 하였는데,

배신청(陪臣廳)에 배향된 16명의 고려충신 으로는 고려 전기의 무장이자 개국공신인 (武將) 복지겸(卜智謙)과  홍 유(;洪 儒)와 신숭겸(申崇謙,?∼927),

그리고 유금필(庾黔弼,?~941)과 배현경(裵玄慶,?∼936)을 모셨으며,

고려 태조 때 담판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고 영토 확장에 기여한 고려 초의 문신이자 외교가인 서 희(徐 凞,942년 ~ 998)와,

귀주대첩(龜州大捷)의 명장인 강감찬(姜邯贊,948∼1031)과 예종 때 왕권강화에 기여하고 여진정벌에 활약한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 관(尹 瓘,?~1111)과,

삼국사기를 지은 문신. 학자, 문인인 김부식(金富軾,1075~1151)과 고려 고종 때 거란을 크게 무찔러 격퇴한 무신인 김취려(金就礪,1172~1234)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거란족을 몰아낸 조 충(趙 忠,1171∼1220)과 몽골에 맞선 항쟁의 무신 김방경(金方慶,1212~1300)을 모셨고,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고려말의 무장 안 우(安 祐,?~1362)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홍건적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친 이방실(李芳實,1298∼1362)과,

고려 후기의 문신, 무장으로 홍건적을 물리친 김득배(金得培,1312∼1362)와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인 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을 모셨으며,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습니다.

 

 

 

정전인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인 천수문(天授門)으로 숭의전(崇義殿)을 나옵니다.

삼문인 천수문(天授門)의 "천수(天授)"는 태조왕건이 918년 고려를 세우며 사용한 최초의 연호 이기도 합니다.

 

 

 

숭의전(崇義殿)의 뒷쪽으로 나있는 길을따라 가보면,

 

 

 

트레킹 코스로도 좋은 평화누리길의 11코스인 "임진적벽길"로 향하는 입구가 있어,

 

 

 

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면,

절벽아래에 1789년 마전군수였던 한문홍이 새긴 칠언칠구의 시(詩)가 있는 잠두봉(蠶頭峰)과,

"썩은소"의 전설이 있는 전망대를 만나게 되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상징이였던 종묘사직을 없애기 위해,

송도의 종묘에 봉안되어 있던 고려왕들의 위패를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배는 물흐름과 반대로 임진강 상류 방향으로 역류하며 스스로 삭녕지역까지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숭의전(崇義殿) 인근에 있는 동이리 "썩은소"에서 하루를 정박한후에,

3km 아래에 있는 앙암사(仰巖寺) 석벽(잠두봉) 아래로 떠 내려와 머무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에 왕씨 자손이 남몰래 위패를 거두어 이곳에 묘를 짓고 이를 봉하였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잠두봉(蠶頭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로 향하는 임진강의 푸르른 물을 바라보는것으로 숭의전지(崇義殿址)의 답사를 마무리 합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에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고 전하여,

지금의 숭의전이 9칸의 규모 이므로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곳으로,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사당인,

연천의 유적, 숭의전지(崇義殿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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