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에 있는,

함평의 정자 문화재, 영파정(潁波亭)을 찾았습니다.

 

영파정(潁波亭)은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파정(潁波亭)은 세조 1년(1455)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영파(潁波) 이안(李岸 1414~?)이 은거 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정자로,

 

 

 

정자 옆에는 "영파정유허비(潁波亭遺墟碑)가 있어,

영파정유허비는 함평공원에서 옮겨온 것으로 비각기(碑閣記)는,

개항기의 호남의 유학자이자 항일 의병장이었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썼다고 합니다.

 

 

 

영파정(潁波亭)을 처음 세운 시기는 1450∼1460년대로 추정하며,

정유재란(1597) 중에 불에 타 없어진 후 영수정(潁水亭)이란 이름으로 다시 지었으며,

1820∼1821년 사이에 권복(權馥)과 김상직(金相稷)에 의해 현재의 영파정으로 중건 되었고,

1843년(헌종 9) 군민의 강무와 사례를 위한 건물로 활용 되기도 하였으며,

1883년(고종 20)에 크게 보수하고 1966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어 560여년의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쪽은 동쪽에 1칸만 온돌방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꾸몄고,

창문은 대청 뒷면과 옆면에 나무판재로 쌍여닫이를 설치하고 앞면은 모두 트여 있으며,

 

 

 

영파정(潁波亭)의 현판으로,

글씨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과 신학문을 반대하는 생활로 일관했던 강직한 서예가 강암(剛岩) 송성용(宋成鏞 1913∼1993)이 썼다고 하며,

 

 

 

정자의 동편 안쪽에 1칸의 온돌방을 둔 모습이며,

 

 

 

영파정(潁波亭)의 우물마루는 1칸의 방을 제외하고  5칸을 마루로 두어 시원하게 너른편이고,

 

 

 

마루 위에는 걸쇠의 모습을 볼수 있어,

예전에는 정자의 마루에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큰 문인 분합문(分閤門)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 집니다.

 

 

 

마루 안쪽에는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1807년(순조 7)에 새로 지으면서 이름한 "영수헌(潁水軒)"의 현판이 있어,

이삼만(李三萬)이 제액(題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파정의 또다른 이름인 "관덕정(觀德亭)"의 현판이 있고,

 

 

 

영파정(潁波亭)의 원운(原韻) 편액(扁額)으로,

맨 앞에 있는 이안(李岸)의 시문(詩文)으로,

樓高飛雁平看背   정자가 높으니 날아가는 기러기 등이 보이고

水淨遊鰕細數鬚   물은 맑으니 노니는 새우 수염을 세겠네

 

 

 

영파정(潁波亭)의 원운(原韻)외,

이석규, 오상연, 윤종의, 이면상, 이영헌, 윤영숙 등 5기의 현액시(懸額詩)가 게판 되어 있고,

 

 

 

1933년의 "영파정중수기(潁波亭重修記)"가 있으며,

 

 

 

1966년의 "관덕정중수기(觀德亭重修記)"가 편액(扁額)되어 있고,

 

 

 

관덕정기(觀德亭)을 중수(重修)하면서 힘을 보탠 이들의 명단 편액이 함께 있습니다.

 

 

 

1883년의 "영수정중수게판(潁水亭重修揭板)"의 기문(記文)과,

 

 

 

1881년의 영수정중수기(潁水亭重修記)로 권재우의 기문(記文)이 올려져 있습니다.

 

 

 

영파정(潁波亭)의 공포는 초익공식이나 쇠서밑으로 짧은 촛가지를 하나 더 내었으며,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위에 대량(大樑)을 걸고 그 위에 비교적 긴 동자주를 놓고 종량을 걸은 5량가로,

도리는 모두 장혀받침 굴도리를 사용했으며 양측면의 중심기둥은 대량 위로 충량을 걸었습니다.

 

 

 

영파정(潁波亭)의 주인 이안(李岸 1414~?)의 자는 야부(野夫) 호는 영파(潁波)로,

본관은 함평(咸平)으로 원래 직산(稷山)에서 세거 하였으며 19세인 때인 1432년(세종 14)에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454년에 박팽년(朴澎年)이 효 겸 학행으로 천거하여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 되었고,

단종이 1455년 윤 6월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니 비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처조카인 신말주(申末舟,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와 낙향길에 올라,

숙주(申叔舟)의 아우 신말주(申末舟,1439∼?)는 순창 가남리에 귀래정(歸來亭)에 은거 하였고,

이안(李岸 )은 나주 금안동(金鞍洞)에 은거 하였다가 함평 기각리 영수정(潁水亭)에 은거 하였는데,

그는 행의(行誼)또한 성학정신(聖學精神)에 투철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정통 하였다고 하며,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은둔 하였으니,

중국의 고사에서 나오는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청풍고절(淸風高節)을 잇기 위한것 였습니다.

 

 

 

이안(李岸)의 영파정(潁波亭)이 기산영수(箕山潁水)와 관련한 이야기로,

후에 대천(大川)으로 불리던 강은 영수(潁水)가 되고 정양동(井陽洞)의 뒷산은 기산(箕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티 없이 맑게 살았던 기산과 영수의 고사로,

정명은 허유(許由)가 천하를 맡아 달라는 요 임금의 말을 듣고 못 들을 말을 들었다며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다는 고사에서 연유 하였는데,

허유(許由)는 요 임금이 자신에게 천하를 양보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으며,

또 그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 하자 영수(潁水)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합니다.

 

 

 

영파정(潁波亭)에서 함평현감을 지낸 참판 오연상(吳淵常)의 시문(詩文)으로,

十里奇無賞   십리들 둘러도 볼만한 곳 없지마는

玆亭慰寂寥   이 정자 여기 있어 쓸쓸함 달래주네.

觀魚春水岸   물 맑은 시냇가 고기 구경하면서

立馬夕陽橋   해지는 다리에서 말을 세우네

 

 

 

구기산 앞자락을 흘러가는 영수천인 함평천으로,

영파정 앞으로는 함평천이 흐르고 그 함평천에는 팔각의 정자와 함께 보호수인 수양버들 두그루가 물위에 자라고 있어,

노거수 수양버들은 수령이 100년 이상의 보호수 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정자 바로 앞으로 대천(大川)으로 불렸던 함평천이 흘렀으리라 짐작되어,

지금보다 더욱 풍광이 뛰어난 곳에 자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며,

 

이안(李岸)의 기산영수(箕山潁水)의 충철을 엿볼수 있는 곳으로,

전남 함평의 정자 문화재, 영파정(潁波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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