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명옥대(鳴玉臺)를 찾았습니다.

 

안동의 정자 "명옥대(鳴玉臺)"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4호로 지정 되었으며,

 

 

 


명옥대(鳴玉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국보 제15호인,

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으로 유명한 봉정사(鳳停寺)로 오르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어,

 

 

 

봉정사(鳳停寺)로 들어가는 길을 잡고 오르면 얼마지 않아 명옥대(鳴玉臺)의 표지석이 있어,

 

 

 

오솔길을 따라 들어오면 명옥대(鳴玉臺)의 모습이 보이고,

 

 

 

커다란 바위 사잇길을 지나면 명옥대(鳴玉臺)를 만나게 되어,

 

 

 

명옥대(鳴玉臺)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사림에서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후학들에게 강도(講道)하던 자리를 기념하여 개곡(開谷) 이이송(李爾松) 등이 1667년에 지은 정자로,

정자의 옛 이름은 퇴계의 시에 나오는 "창암(蒼巖)" 이라는 두 글자를 따 창암정사(蒼巖精舍)라 하고 이름을 낙수대(落水臺)라 불렀으나,

육사형(陸士衡)의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 "나는 샘이 명옥을 씻겨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구절을 따와 명옥대로 바꾸었다고 하며,

 

 

 

정자는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통재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사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게 해두었고,

내진주(內陣柱)와 주상(柱上)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後代)에 지금과 같이 전면적(全面的)으로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改造)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도 1920년 고쳐지었다고 합니다.

 

 

 

정자 앞에는 "명옥대사적비(鳴玉臺史蹟碑)"가 있어,

퇴계 이황이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는 내용 등을 적고 있다고 하며,

 

 

 

명옥대(鳴玉臺) 옆에는 계곡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암반에는 "명옥대(鳴玉臺)"라는 암각서(巖刻書)가 남아 있어,

"신내옥, 이재, 문위세, 윤강중, 흠중, 단중 형제가 1567년 여름에 이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노닐다가,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선생의 뜻을 기렸다(辛乃玉 李宰 文緯世 尹剛中 欽中 端中 隆慶元年夏 同遊開林 築臺題詩 以追退溪先生之志)"의,

작은 글씨가 함께 암각되어 있습니다.

 

 

 

정자 옆을 흐르던 석간수는 흐르다 멈추어 있고,

 

 

 

앞에는 한그루의 소나무가 정자를 지키듯 서 있습니다.

 

 

 

명옥대(鳴玉臺)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친구들과 놀던 곳으로,

이황은 16살 때 봉정사에서 사촌인 이수령, 권민의, 강한과 함께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다고 하며,

봉정사에서 독서를 했던 이황은 50년이 지난 1566년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고 합니다.

 

 

 

해서체의 명옥대(鳴玉臺) 현판으로,

명옥대(鳴玉臺)란 "물이 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누대"라는 의미라 하며,

 

 

 

초서체의 창암정사(蒼巖精舍)의 현판도 있어,

퇴계의 시에 나오는 창암(蒼巖)이라는 어구에서 따왔다고 하며 1667년 정자를 처음 지을때의 정자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명옥대(鳴玉臺)의 마루로 오르는 곳은 뒤편에 있어,

 

 

 

1667년 처음 창암정사(蒼巖精舍)로 세워 질 때의 형태는 1칸의 방이 있고 2칸의 마루를 둔 3칸의 건물 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루만 있는 2칸의 건물이며 또한 정자 뒤에는,

3칸의 승사(僧舍)를 지어 승려들이 상주하며 창암정사를 관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명옥대(鳴玉臺)의 기둥 위에는 주두와 보아지를 놓아서 보를 결구 하였고,

종량의 한쪽 끝은 동자주(童子柱) 위에 보아지를 놓아 결구 하였으며 다른 쪽 끝은 대접받침 위에 보아지를 놓아서 결구 하였고,

그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우고 첨차(檐遮)를 직교시켜 마루대와 장혀를 얹었습니다.

 

 

 

명옥대(鳴玉臺)의 마루에는 단1기의 현액시(懸額詩) 만이 편액(扁額)되어 있어,

爲報溪翁坐詠時(위보계옹좌영시)    일찍이 계옹(溪翁)이 시 읊었다 일러다오.

此地經遊五十年(차지경유오십년)    오십 년 전 그 어느 날 이 곳에 와서 놀 제

韶顔春醉百花前(소안춘취백화전)    온갖 꽃 그 앞에서 봄빛에 취했더니

只今攜手人何處(지금휴수인하처)    손 잡고 함께 온 사람 이젠 어디 갔단 말고

依舊蒼巖白水懸(의구창암백수현)    푸른 바위 흰 폭포만 예와 다름없을 뿐일세. 

 

白水蒼巖境益奇(백수창암경익기)    푸른 바위 흰 물굽이 그 경계가 기이하거늘

無人來賞澗林悲(무인래상간림비)    구경 손님 가고 나면 시내 숲도 슬퍼하리라.

他年好事如相問(타년호사여상문)    다른 때 호사자가 예 와서 묻거든

爲報溪翁坐詠時(위보계옹좌영시)    일찍이 溪翁이 시 읊었다 일러다오.

절구 두 수는 퇴계 이황의 원운(原韻)으로,

옛 판은 퇴계가 직접 썼고 1666년(현종 7)에 처음 걸었는데 1926년에 잃어 버렸는데 1941년 4월에 다시 새겼습니다.

 

 

 

퇴계의 족후손인 이정백은 퇴계의 이 원운을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절구 두 수를 지었습니다.

仙遊當日事傳奇(선유당일사전기) 신선놀음 당일에 일 기이함 전하니

遺跡還今來世悲(유적환금래세비) 끼친 자취 도리어 후세를 슬프게 하네

落盡山花春雨後(낙진산화춘우후) 산꽃 다 떨어지고 봄비 내린 후에

啼禽何事月明時(제금하사월명시) 우는 새는 하필 달 밝은 때인가

 

簫寺重尋二十年(소사중심이십년) 절 거듭 찾아오기 이십 년

飛花撩落馬蹄前(비화료낙마제전) 흩어지는 꽃 어지러이 말발굽 앞에 떨어지네

雲窓寂寂香烟絶(운창적적향연절) 구름 창은 적적하고 향기 연기 끊어지니

坐愛松關白日懸(좌애송관백일현) 소나무 사이에 앉아 높이 뜬 해 사랑하노라

 

 

 

퇴계의 제자로 알려진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시(詩) 낙수대(落水臺) 입니다.

萬古雲門第一奇    만고의 운문 중에 제일로 기이하니

飛泉嗚咽似含悲    폭포가 오열하여 슬픔을 머금은 듯하네

退翁去後空鳴玉    퇴계가 떠난 뒤에 명옥대만 남았으니

再遇知音問幾時    어느 때에 지음을 다시 만나 찾아갈까

 

 

 

봉정사(鳳停寺) 어귀의 왼쪽 의 건너편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의 산람과 더불어 계곡의 맑은 물소리로 시원함을 줄길수 있는곳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유허가 남아있는 정자인,

경북 안동의 정자 문화재, 명옥대(鳴玉臺)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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