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 있는,

자온대(自溫臺) 위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정자 "수북정(水北亭)"을 찾았습니다.

 

4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부여 "수북정(水北亭)"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인 "수북정 청람(水北亭 靑嵐)"의 빼어난 정취를 자랑하는 곳으로,

 

 

 

백마강변(白馬江邊)의 솟아오른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경관이 트여 있는곳에 자리한 "수북정(水北亭)"은,

조선조 광해군(1608∼1623)때 양주(楊州) 목사(牧使)를 지낸 김흥국(金興國,1557∼1623)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때 건립한 정자로,

자신의 호를 따서 수북정(水北亭)이라 명명 하였다고 하며,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바닥은 방은 들이지 않고 모두 우물마루로 깔아 두었으며 사면의 처마에는 활주가 받치고 있습니다.

 

 

 

초석은 마루하부까지 석주를 올린 위에다 원주의 기둥을 올려두어,

빗물의 유입 등으로 인한 기둥 하부의 약해짐을 보강 해두어 정자의 건실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자의 전면에 올려져 있는 수북정(水北亭)의 현판으로,

전서와 예서에 두루 능했던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1760~1840)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디딤돌을 통하여 정자의 마루에 오르면,

 

 

 

안쪽에서 또 하나의 수북정(水北亭) 현판을 볼수 있으며,

 

 

 

수북정(水北亭)의 마루에서는 특이한 기둥배치를 볼수있어,

외부기둥과 내부기둥을 가로 줄에 맞추지 않았고 내부는 별도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마치 예전에는 가운데 방을 들였던 듯한 착각이 들게하는 기둥의 배치 입니다.

 

 

 

정자의 천정은 가운데 기둥 부분의 서까래를 감춘 우물천정이고 주변은 서가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며,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로 빼어난 정취를 자랑했던 수북정(水北亭)에는,

시판(詩板)을 비롯한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수북정(水北亭)에는 신흠의 수북정(水北亭) 팔경시판(八景詩板)을 비롯하여,

10여기의 현액시(懸額詩)가 올려져 있는데 일부는 편액이 떨어져 나가 있는 모습이며,

 

 

 

한문으로 쓰여진 "수북정기(水北亭記)"의 편액이 있고,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1969년의 "수북정기(水北亭記)" 편액도 볼수 있으며,

 

 

 

같은해인 1969년의 수북정중수기(水北亭重修記)의 편액으로 역시 한글과 한문이 혼용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백제교가 건설 되기 전까지 수북정 남쪽에는 "규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며,

부여 군민중 향교 유림들의 한시 대회가 열리던 장소 이기도 하였는데,

청룡강(현재의 백마강)이 남부여를 북서로 감싼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으므로,

청룡강 물의 북쪽이란 의미로 수북정(水北亭)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며,

 

 

 

수북정(水北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왼쪽의 강건너에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扶蘇山)과 나성(羅城)이 있고,

정자 아래에는 백마강(白馬江)이 맑게 흐르고 있는데 백제교의 다리로 인해 옛정취가 반감되는 느낌이며,

 

 

 

나무들 사이로 백마강(白馬江)의 푸른물과 강건너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백마강이 강경 쪽의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어,

빼어난 정취로 수북정(水北亭)은 부여팔경(扶餘八景)의 하나에 속했으며 문인들의 회합 때에 자주 이용 되었다고 합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와,

수북정(水北亭)의 주변을 돌아보다 보면,

 

 

 

정자 앞에는 낭떠리지의 암반이 있어,

수북정(水北亭) 아래쪽에 있는 자온대(自溫臺) 가까이로 감히 내려가 보지는 못하고,

 

 

 

일제 강점기 엽서에서 1900년대의 수북정(水北亭)과 자온대(自溫臺)의 전경을 알수있는 자료가 있어 참고로 가져와 봅니다.

자온대(自溫臺)는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왕흥사(王興寺)로 예불을 드리기 위해 왕래할 때 늘 이 바위에서 쉬어 갔다고 하며,

왕이 도착할 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구들돌이라 명명 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사실은 왕의 행차때 신하들은 그때마다 임금 몰래 불을 피워 바위를 미리 데워 놓았다고 하며,

이를 모르는 임금은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하여 “자온대(自溫臺)”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하며,

암벽 중하부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자온대(自溫臺)라고 쓴 암걱서 새겨져 있습니다.

 

 

 

수북정(水北亭)을 지은 김흥국(金興國,1557∼1623)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인(景仁) 호는 수북정(水北亭)이며,

1589년(선조 22) 유학으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정언·주서 등을 역임 하였고,

1596년 북평사(北評事) 등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02년에 형조정랑에 올랐으며, 

외직으로는 영변·회양의 수령을 거쳐 1605년 한산·양주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는데,

광해군 말년 정치의 문란으로 반정을 도모한 김류(金鎏), 이귀(李貴)로 부터 가담할 것을 종용받자,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으니 어찌 가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하고 관직을 버리고 낙향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아들에게도 묘비에는 양주목사라고 쓸 것을 명하는 절개를 보였습니다.

학문에 힘썼으며 시문을 좋아하여 낙향하여서는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 하였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 하였으며,

저서로는 수북정집(水北亭集)이 있었으나 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낙본만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거유였던 김장생(金長生), 신흠(申欽), 황신(黃愼) 등과 교유하며 친교가 깊었으며,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빼어난 풍광이 있는곳에 자리하여 만년을 보냈던 곳으로,

"수북정 청람(水北亭 靑嵐)"은 규암진 귀범(窺岩津 歸帆)과 더불어 부여팔경(扶餘八景)의 으뜸으로 꼽혔던 김흥국(金興國)의 정자,

충남 부여의 "수북정(水北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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