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향교로,

옛 교동도호부의 공립 교육기관였던 "교동향교(喬桐鄕校)"를 찾았습니다.

 

교동향교(喬桐鄕校)로 들어가는 홍살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喬桐鄕校)는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홍살문의 오른편에는 이제 막 조성을 하고 있는듯 비석군이 있어,

교동 읍내리 비석군으로 조선조 교동지역에서 선정을 펼친 수군절도사겸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으로,

이 비(碑)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것들을 1991년 이후 이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한곳에 모아둔 40여기의 비석들 가운데 제법 규모가 있는 부사(副使)를 지낸  비(碑)도 있으며,

 

 

 

이곳에서 부사(副使)를 지낸 정(鄭)씨 성의 비석은 문양이 있는 돌에다 크기도 달라서 한눈에 들어 옵니다.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도(喬桐島)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한 마을이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별개로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도 국방상의 중요성으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수영이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지역 였다고 합니다.

 

 

 

돌계단과 솟을 삼문이 나타나며 교동향교(喬桐鄕校)로,

고려 인종(仁宗) 5년(1127년)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며,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 되었습니다.

 

 

 

삼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두고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있어,

명륜당은 일반적으로 앞면에 짝수칸을 쓰지 않는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특이하게도 앞면 4칸 옆면 2칸이라는 칸수를 채택하고 있으며,

중앙의 2칸은 대청으로 하고 양옆면을 대칭으로 앞면 각 1칸씩 온돌방을 배치 하였고 중앙의 대청은 앞면을 띠살문의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고,

뒷면은 판장문 미닫이를 두었으며 오른쪽 온돌방 주변에는 함실을 두어 윗쪽을 수납공간으로 사용 했습니다.

좌우측 온돌방의 앞면 창호는 상부에 두어 진입은 대청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했으며,

5량 구조로서 민도리 형식의 소박한 가구를 갖추고 외무의 보뺄목 밑에 헛첨차 형태의 구조가 밑을 받치고 있습니다.

 

 

 

강학공간의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의 현판이며,

 

 

 

명륜당(明倫堂)은 막돌초석에 팔작지붕의 홑처마로써 단청을 제외하고는 일반 민가의 건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명륜당 뒷면과 내삼문 사이의 공간에는 계단 양쪽에 조경이 조성되어 있고,

교동도의 겨울 날씨가 추운 까닭에 두터운 외벽에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건물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습니다.

 

 

 

명륜당 옆의 동재의 모습으로,

동재는 정면 3.5칸 측면 5칸의 "ㄱ"자 형태로 장방향의 3칸과 단방향의 2칸을 온돌방으로 구성하고,

중앙에 정면 1.5칸 측면 2칸 규모의 부엌 공간을 배치 시켰으며,

중정을 향하는 장방향 부분의 온돌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단방향 부분에는 온돌방 전면에 전실형태의 퇴간을 두고 부엌과 온돌방에 걸쳐 내부 공간으로 구성 하였으며,

내부는 5량 구조로서 민도리 형식의 가구 구조로 홑처마에 팔작지붕 입니다.

 

 

 

동재의 모서리 부분과 벽으 중하부에서 볼수 있는 특이한 모습으로,

명륜당과 마찬가지로 벽을 두텁게 해두어 추위와 방화를 위함이라고 하며,

 

 

 

동재의 앞으로 길게 빼어둔 굴뚝의 모습이 특이하며,

 

 

 

동재의 뒤편에는 장독대로 보이는곳이 있어 눈길이 가는데,

장독대는 향교 내에서 흔이 볼수없는 배치 이기도 합니다.

 

 

 

서재는 정면 2칸 측면 3칸의 "ㄱ"자형태로 동재보다 규모가 다소 작은데,

측면 2칸은 칸막이가 없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정면 2칸은 흙바닥의 광(창고)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방 앞면은 띠살창호 뒷면은 상부에 빗살창호를 두고 광에는 판장문 외의 채광창을 두지 않았으며,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가구는 5량이며 민도리 양식의 소박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서재의 굴뚝은 동재와 달리 벽 가까이 있으며,

돌이 아닌 기와를 이용하여 쌓아올린 굴뚝이며 두 건물 모두 벽체를 방화벽으로 하여 화재에 대한 엄격한 보호구조를 택했고,

전성기 향교에서 보이는 평면구조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며,

유생들의 숙소로 쓰이는 동,서재는 거의 일반 살림집의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어 특이 합니다.

 

 

 

동재와 서재에서 볼수있는 각주의 나무기둥으로,

기둥의 아랫부분은 새로 끼워서 맞춰올린 모습을 볼수 있고,

 

 

 

강당인 명륜당 뒤쪽에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있어,

향교의 전형적인 배치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볼수 있으며,

제향공간인 사당은 그 위계성을 따라 후면의 높은 곳에 배치 하였습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닫혀 있으나,

동재 뒤편으로 사당으로 오르는 길이 별도로 있어,

 

 

 

계단을 오르면 오른편에 제기고(祭器庫)가 있어,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맞배지붕 옆에는 풍판이 있고 좌우측 및 뒷면 벽체는 두터운 방화벽을 쌓았고,

앞면부에만 판장문 미닫이로 열고닫을 수 있게 했으며 왼쪽 판장문 윗쪽에 환기용 살창이 설치되어 있으며,

가구는 3량 구조이며 홑처마에 납기둥, 민도리 형식으로 소박한 형태로,

내부에는 유기 보궤와 용작, 작, 작대, 저상, 향합, 향로, 촛대, 목두, 축변, 향상, 가마, 식정, 제복, 유건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기고 앞에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사주문이 있어,

 

 

 

제향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년)에 제거(提擧) 안향(安珦, 1243년 ~ 1306년)이 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하여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 하였으며,

현종(顯宗) 8년(1667년)에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 영조(英祖) 17년(1741년)에 강화부사 조호신(趙虎臣)이 지금의 위치로 이건 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향교 건물이 퇴락한 것을 1960년에 중수 하였고 동서 재실과 내외삼문의 개건 및 단청 보수가 1981년에 이루어 졌습니다.

 

 

 

대성전(大成殿)으로 들어오는 큰문인 내삼문의 모습이며,

 

 

 

대성전 앞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의 건물이 마주하고 서있어,

본래 "위패봉안"을 하는 용도의 건물 였으나,

세월의 흐름으로 위패는 대성전에 모두 봉안 하게되어 비워두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며,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는 모두 3칸으로 앞면에만 창호를 두고 양옆칸에는 띠살문을 가운데칸에는 문이 없이 위쪽에 띠살창만 두었으며,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고 내부는 5량 구조에 민도리 형식의 백골집이며,

현재는 향토관과 충효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당인 대성전(大成殿)으로,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양쪽에 풍판을 두고 전체 건물에 단청을 하였고,

퇴간부에만 팔각추 형태의 장주형 주춧돌과 원형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난 초석에 네모난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향교내의 유일한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갖추고 있으나 그것도 후면부에는 민도리 형식으로 보뺄목만 내놓은 상태이며,

대성전 가운데 정면 3칸에는 띠살창호로 들어 열개문을 달고 가구는 1고주 7량 구조로,

윗부분 종도리 밑에는 판대공으로 간단히 받치는 구조를 취하였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의 현판이며,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동향교(喬桐鄕校)는 강학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동서 재가 일렬로 병치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향교나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로서 초창기 한국의 향교 건축에서 "강학공간"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시기에 조성되어 나타나는 모습으로 여겨 집니다.

 

 

 

강화의 교동도를 여행하면서 찾은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공립 교육기관인 향교로,

큰 규모의 향교는 아니지만 향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설때의 모습을 찾아볼수 있는곳으로,

강화 교동도(喬桐島)의 교동향교(喬桐鄕校)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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