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있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지사 생가(南慈賢志士 生家)를 찾았습니다.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 생가(生家)는 1999년 영양군과 남자현 후손들에 의해 복원한 생가(生家)로,

남자현(南慈賢)은 안동시 일직면에서 태어났으나 얼마 후 이곳으로 이주 했다고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생가 옆에는 1999년에 세운 "남자현지사항일순국비(南慈賢志士抗日殉國碑)"가 있어,

국문과 한문을 혼용하여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유한상(柳漢尙)이 썼다고 합니다.

 

 

 

생가의 5칸의 문간채의 모습으로,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 비견되어,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리며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독립운동가 이며,

 

 

 

2015년에 개봉하여 관객 천만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로,

이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전지현씨가 열연한 "안옥윤"이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남자현(南慈賢)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여,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에 대해서 한동안 사람들에게 회자 되기도 하였는데,

사실 남자현이 영화의 실제 모델은 아니며 영화의 내용과 남자현의 실제 삶과는 상관이 없으며 모티브만 되었을 뿐이라 합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보이는 본채의 모습으로,

본채와 대문채를 포함하여 상당히 규모가 있는 집으로 여겨지는데,

남자현지사는 영양 출신으로 학자였던 정한(廷漢)의 딸로 태어나 가문있는 집안 출신으로 여겨지며,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가구는 오량이고 홑처마이며 사방에 토석담장을 두른 독립적인 건물로 배치되어 있으며,

 

 

 

본채는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입구에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뒤에 아궁이를 넣은 부엌을 두었고,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우측에 온돌방 1칸이 있고, 고방으로 짐작되는 쪽방이 있으며,

마루에는 뒷문을 달아 여름철 통풍에 효율성을 높혔습니다.

 

 

 

본채의 부엌앞에 장독대가 있어,

옛 장독들이 나란히 배치하여 두었으며,

 

 

 

남자현(南慈賢,1872∼1933)의 본관은 영양(英陽)으로 경상북도 영양 출신의 학자였던 통정대부 정한(廷漢)의 딸로 태어나.

19세 때 김영주(金永周)와 결혼 하였고 6년 후인 1895년 남편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3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면서 홀시어머니를 봉양하며 20여 년 이상 집안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 하였으며,

시어머니 사망 후 삼년상을 치른 다음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에 참여 하였는데,

3.1운동의 경험으로 독립운동을 결심한 그녀는 장롱 속에 넣어둔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간직하고,

아들과 함께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자신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 하였고,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재만조선여자교육회(在滿朝鮮女子敎育會)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으며,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 하였습니다.

1925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 갔는데,

마침 그때 길림(吉林) 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 하였고,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여 석방하게 만드는 데 일조 하였으며,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1932년에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 하였고,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부토(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62세를 일기로 혁명 생애를 마쳤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남자현(南慈賢)은 스스로 손가락 세 개를 자른 인물로 알려져 있어,

독립군 내부에 분파가 생기고 그들끼리 싸우는 일이 생기자 그녀는 7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간부들을 소집한 후 통합을 호소 하였는데,

그의 정성과 각오에 마음이 움직인 독립군 간부들이 분쟁을 접고 화합을 이루었다고 하며,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와 관련한,

고정희의 "남자현의 무명지"라는 시(詩)가 있어 가져와 봅니다.

구한말의 여자가 다 이리 잠들었을진대 /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

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 / 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의 혼백 앞에 자유 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

그때 그대는 보게 되리라 / 대한여자독립원이라 쓴 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

경북 안동 출신 남자현,열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 밥짓고 빨래하고 유복자나 키우다가

딱 깨친 바 있어 / 안동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 서로군정독립단 일원이 되니라

북만주벌 열두 곳에 해방의 터를 닦아 / 여성 개화 신천지 씨앗을 뿌리며

국경선 안과 밖을 십여성상 누비다가 /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 피로 받아 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 생가(生家)의 마루에서 보이는 전경으로,

생가 앞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가 남자현 지사의 위상을 전하는듯 합니다.

 

 

 

복원된 생가(生家)의 뒤편을 살펴보고 생가에서 나옵니다.

 

 

 

본채 뒤편 경사진 산 쪽으로 남자현지사 영정을 모신 추모각(追慕閣)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복원 하였으며,

 

 

 

추모각(追慕閣)에 모셔진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의 영정으로,

독립을 위한 열정으로 애국의 생을 보냈던 숭고한 정신에 고개가 숙여 집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편협한 대우로 해방 후 60년 이상 그녀는 거의 잊힌 존재 였었는데,

2015년에 와서야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을 통해 이름이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진 인물로,

독립을위해 헌신하였던 남자현지사(南慈賢志士)의 생을 살펴볼수 있는 곳이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해에 찾아 볼만한 곳으로,

경북 영양의 남자현지사 생가(南慈賢志士 生家)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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