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로,

부여 여행에서 부소산성과 함께 부여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정림사지(定林寺址)"를 찾았습니다.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는대한민국사적 제301호로 지정 되었으며,

어른의 경우 15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 유로 공간으로,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서기 538년 봄에 백제 성왕이,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定林寺)가 세워 졌으며,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장방형의 영지(影池)로 보이는 연못이 2개가 있어,

중문 밖에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는데,

이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연못을 지나면 국보 제9호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 이 있어,

석탑의 높이는 8.33m이며 석탑의 구조는 일반적인 건축이나 석탑에서와 같이 지대석(地臺石)을 구축하고 기단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놓고 정상에는 상륜부(相輪部)를 형성 하였으며,

이 석탑은 목조탑의 구조를 석재로써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탑으로서,

좁고 낮은 단층기단과 각 층 우주에 보이는 배흘림수법과 얇고 넓은 각 층 옥개석의 형태와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및,

목조건물의 두공을 변화시킨 옥개석 하면의 받침수법, 낙수면 네 귀의 우동마루형 등에서 그와 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탑의 초층탑신에는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리는 글이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어서,

한때 "평제탑(平濟塔)"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라 합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은 익산의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과 함께,

백제석탑이 목탑의 번안(飜案)이라고 하는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계보를 정립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석탑 주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태평8년무진정림사)"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초기에는 정림사(定林寺)라고 불렀던 것이 확실히 밝혀져,

그 뒤 이 석탑의 명칭을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태평 8년은 1028년(현종 19)으로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던 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석탑의 기단부는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8매의 낮은 돌을 놓은 다음,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탱주 면석이 16매로 조립되어 있는 중석을 놓았고 중석 위에 갑석(甲石)은 8매로 구성되었으며 두꺼우며,

상부면은 약간의 경사가 있도록 하여 낙수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탑신부를 받는 받침 없이 평평한 갑석 위에 탑신을 놓았고,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108개나 되는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층의 조립형식은 같으며,

초층탑신은 규격이 크기 때문에 12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네 귀퉁이에 배흘림이 있는 우주석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은 2매씩의 긴 판석을 끼웠고,

2층 이상의 탑신에 있어서는 2, 3층은 4매, 4층은 2매, 5층은 1매의 석재로 구성 되었으며,

각 층의 양쪽 우주에는 역시 배흘림이 표현되었으나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체감되어 아주 낮아졌기 때문에,

우주도 짧아서 배흘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체감된 탑신석 전체에 비하여 우주의 폭이 넓게 조성 하였습니다.

 

 

 

탑의 상륜부는 5층옥개석 위에 거의 원추형에 가까운 노반석(露盤石) 하나가 있을 뿐 다른 부재가 없으며,

찰주공(擦柱孔)은 노반을 관통하여 그 밑의 옥개석 중심부에까지 패어 있으며,

1963년 조사에서 4층 탑신 남면에 두께 13cm의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각 층의 옥개석은 낙수면부와 받침부가 별개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여러개의 판석으로 결구 하였는데,

각 세부에서 목조가구의 변형수법을 볼 수 있으며 두공(枓栱: 공포 부재의 총칭)을 변형시킨 받침이나,

낙수면 네 귀퉁이에서의 기와지붕의 우동마루형 등은 목조가구의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낙수면은 평박하면서도 넓어서 늘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이 전체적으로 살짝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처마선처럼 경쾌 합니다.

옥개석 위에는 다른 돌을 놓아 높은 굄대를 만들어 그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어 이와 같은 높은 굄은 2층 이상의 탑신이 지나치게 체감되어,

자칫하면 중후해질 것을 우려하여 취해진 구조로서 이로 말미암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경쾌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옥개석 하면의 받침부는 4매의 각형 판석을 아래에 그 위에 다시 8매의 각을 죽인 모죽임형 판석을 얹은 2단으로,

미륵사지석탑에서 보이는 창방, 평방, 포벽 등의 석재가 없고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모전석탑(模塼石塔)에서 시작된 신라의 석탑 역시 목조건축의 공포 부분을 간략화하여 지붕 아래를 내어쌓기로 하여 옥개 받침을 표현 하였고,

통일신라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이르면 각형의 5단 층급받침 형태로 옥개받침이 정형화되고 낙수면은 지붕모양으로 경사를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은,

백제탑 형식 중 전형적인 석탑이자 석탑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으며,

이 석탑은 각부의 양식수법이 특이하고 본격적인 석탑으로 정착하고 있는 전이적인 규범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석탑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으며,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석탑이기도 합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지나면 금당지(金堂址)가 자리하고 있어,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와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 났으며,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 하였는데,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은,

부여 능산리사지(567년)와 부여 왕흥사지(577년)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져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배치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중문(中門)·석탑(石塔)·금당(金堂)·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져 있고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구획 지었습니다.

 

 

 

금당지를 자나면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판벽을 두르지 않은 맞배지붕의 강당지(講堂址)가 자리하고 있어,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로 1993년에 지어 졌으며,

 

 

 

강당지(講堂址)의 지붕에서 볼수있는 백제의 치미(鴟尾)로,

치미(鴟尾)는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 양쪽끝에 올라가는 장식 기와를 말합니다.

 

 

 

강당지(講堂址) 에서는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定林寺)였고,

1028년(고려 현종 19)에 중건 되었음이 밝혀져 지금의 정림사지(定林寺址)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며,

 

 

 

강당지(講堂址) 내부에는 보물 제108호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扶餘 定林寺址 石造如來坐像)"이 있어,

재료는 화강석으로 높이는 5.62m의 크기이며 고려 시대에 제작된 석조 여래 좌상으로,

 

 

 

백제 폐사지에 있는 비로자나불이며 마멸이 심하여 조각된 의문선이 분명치 않으며,

두부 이상은 언제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불상과 함께 발견된 와당에 있는 명문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백제 폐사지에 개건되었음을 알 수 있있게 하는 불상으로,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을 하였고,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겼는데,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며,

 

 

 

불상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이며,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주고 있어,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하고 있으며,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어,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했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강당지에서 나와 정림사지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비석을 비롯한 여러 석조 조형물들이 있어,

 

 

 

부여임천대교비(扶餘林川大橋碑)로 높이 195cm의 크기이며,

조선중종1510-1512)때 만들어진 대교비(大橋碑)로,

임천면 만사리리 논에 묻혀 있던것을 마을 진입로 확포장 과정에서 제보되어 발굴하게 되어,

2010년에 이곳으로 이전 하였는데 오랫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와 충절을 기린비로 인식해왔으나,

조선시대 영천에서 서천군 한산을 이어지는 대로(大路)상의 하천을 넘는 다리 건립과 관련된 것으로 확인된 비석 이며,

 

 

 

옆에는 향토유적 제113호로 지정된 "명혜공주태실비(明惠公主胎室碑)"가 자리하고 있어,

태실비는 너비 52.9 cm 높이 216cm의 크기로,

명혜공주(明惠公主,1665~1673)는 조선시대의 공주로,

조선의 제18대 현종(顯宗,재위 1660~1674)과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1642~1684)의 차녀이며,

숙종과는 친남매간으로 경종과 영조임금 에게는 고모가 되는데,

명혜공주는 신정(申晸)의 아들인 신요경(申堯卿)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신요경은 동안위(東安尉)로까지 봉해졌으나,

1673년 6월 11일(현종 14년 음력 4월 27일) 가례를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명혜공주가 갑자기 사망 하였고,

명혜공주가 사망한지 약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1673년 9월 12일(현종 14년 음력 8월 2일)에는,

명혜공주의 친언니인 명선공주도 혼례가 결정된 상태에서 요절하고 말았는데,

이에 현종은 두 딸을 불쌍히 여겨 두 공주에 대한 전장(田庄) 및 공장(供帳) 등을 생존한 공주들의 예와 같이 하였으며,

친남매간인 숙종이 즉위한 뒤에는 명혜공주와 명선공주의 사당이 마련 되었고 숙종은 이 사당을 짓는데 조정에서 도움을 주도록 명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공주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에도 조정에서 꾸준히 지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비석군을 들여다 보고 찾은곳은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으로,

 

 

 

정림사지(定林寺址)는 일제강점기 이후 "백제탑 공원"으로 이용 되었으나,

1979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에서 사지(寺址) 전모가 밝혀졌으며 1983년 3월 26일 사적 제301호로 지정 되었고,

이를 연구·관리·전시하기 위해 2006년 9월 29일 "정림사지전시관"으로 개관 하였다가,

2008년 5월에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재되어 현재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의 상설전시관은,

2관으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는데 "백제불교 문화관"과 "정림사지관"으로,

백제불교 문화관 부터 들여다 봅니다.

 

 

 

백제 불교의 일본 전파에 대한 그림으로,

538년(성왕 16)경 경론과 불상을 처음 일본에 전해준 이래 많은 승려들이 일본에 건너 갔으며,

554년(위덕왕 1)에 담혜 등 9명의 승려를 파견했으며, 577년에는 불교전적과 율사·선사·비구니·주금사·불공·사장 등을 보냈고,

584년에는 불상을 보냈고 588년에는 불사리와 승려·사공·와장·화공 등을 보냈으며,

602년(무왕 3)에는 삼론학자 관륵이 건너가 역사·천문·지리·둔갑술 등을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승정에 취임해 일본 승관제의 길을 열었으며,

이외에도 많은 불교승려와 불교관계 기술자 및 불경·불상 등이 전파되어 초기 일본 불교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의 옛모습을 지도의 형상으로 표현해두어,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으로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한쪽에는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의 축조과정을 모형으로 알기쉽게 표현해 두었는데,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을 세우는 과정과,

 

 

 

탑을 세우는 모습을 왕과 관리들이 나와 점검하는 모습에서,

옛 정림사(定林寺)가 당시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임을 알수있게 해두었습니다.

 

 

 

다른쪽에는 사찰 또는 왕궁의 건립을 위하여,

기와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을 인형과 그림으로 재현해 두고있어,

 

 

 

기와를 만들어 말린후 가마에서 구워내는 과정까지 알기쉽게 설명과 함깨 재현하여 전시해 두었으며,

 

 

 

건물을 짓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두었는데,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있는 과정을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지붕을 올리는 기와들를 종류별로 전시해두고,

 

 

 

각종기와의 명칭과 설치에 사용되는 용도를 그림으로 알려주고 있어,

전시되어 있는 기와들과 찾아 비교해 볼수도 있게 해두었습니다.

 

 

 

옆에는 따로이 공간을 두어,

앞에 전시되어 있는 기와와 석탑에 관해서 시청각으로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 있는 공간이 있고,

 

 

 

찬란했던 백제의 불교미술의 한부분으로,

 

 

 

백제의 기술로 알려진 일본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을 비롯하여,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등을 제작하는 과정을 모형으로 재현해 두었습니다.

 

 

 

제1 전시실인 "백제 불교 문화관"을 돌아보고,

두번째 상설 전시관인 "정림사지관"으로 들어가 봅니다.

 

 

 

정림사지관을 들어서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어,

가장먼저 만나게 되는 정림사(定林寺)의 옛 모습을 복원하여 모형으로 세워두어,

 

 

 

발굴을 통해 재현해둔 정림사(定林寺)는,

백제의 가람배치(伽藍配置)의 형태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으로,

중문을 거쳐 탑이 있고 금당과 강당이 남북중심축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좌우로 펼쳐진 회랑이 당과 탑을 둘러싸 강당에 연결되는 형식을 재현해 두었으며,

 

 

 

건물 뿐만 아니라 정림사(定林寺)의 금당앞과 오층석탑(五層石塔) 주변에 사람의 모형까지 배치해 두었고,

정교하게 세워둔 모형 건축물들과 함께 정림사지(定林寺址)를 더욱 알기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1979년과 1980년의 1차 발굴조사와,

2008년∼2010년에 있었던 대대적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 파편 등의 일부를 전시하고 있어,

 

 

 

정림사지 출토 초석(礎石)으로,

정림사지의 초석은 별도의 주좌(柱座)가 없는 특징이 있으며,

네모난 모양의 "방형"과 "원형"의 초석이 전시되어 있으며 백제시대에는 방형의 초석이 많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굴에서 출토된 백제와 고려시대의 기와들도 함께 전시해두어,

시대별로 기와의 모양과 특징을 살필수도 있으며,

 

 

 

정림사지(定林寺址)와 관련한 옛 사진과 발굴과정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전시해두어,

현재와 과거의 정림사지와 주변 모습을 알수 있게 해두 었습니다.

 

 

 

2층에도 정림사지와 백제의 문화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1층 중앙에 모형으로 복원해둔 정림사(定林寺)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 볼수 있게 해 두었으며,

 

 

 

박물관의 한 쪽에는,

백제 무왕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 그리고 지명대사(知命大師) 등의 형상을 둔 포토존이 있어,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을 다녀간 기념으로 사진을 남길수도 있습니다.

 

 

 

부여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오래전에 다녀 갔을 때에는 너른 터에 "정림사지 오층석탑(定林寺址 五層石塔)"만 감상하고 왔어야 했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많이 보완되고 정비가 되어있어 다행이며,

정림사지박물관(定林寺址博物館)이 함께 있어,

옛 정림사(定林寺)와 부여 백제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는 곳으로,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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