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산동부락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문화재인 "청계정(淸溪亭)"을 찾았습니다.

 

장성 청계정(淸溪亭)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청계정과 같은 이름의 정자는 경북 영양과 전북 정읍 에서도 찾아볼수 있으며,

 

 

 

청계정(淸溪亭)은 1546년(조선 명종1)에 청계(淸溪) 박원순(朴元恂, 1510~1560)이 지은 정자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3대손인 박정현이 고쳐 지었으며,

 

 

 

정자의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낮은 기단위에 커다란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 머리에는 경사지게 깎은 보아지를 끼워 주두를 받치고 있으며,

주두 위에는 커다란 대들보를 통간에 걸쳐 단일부재로 얹었으며 직각방향으로 장혀받침 굴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치고 있고,

기둥 사이에는 창방을 걸치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식 하였습니다.

 

 

 

청계정(淸溪亭)의 현판으로,

"청(淸)은 가훈이며 계(溪)는 원천물이 맑아 흐름이 쉬지 않는다." 라는 의미라고 하며,

 

 

 

정자의 가구 구조는 평5량가로 대들보위에 낮은 동자주(童子柱)를 세우고 종량(宗樑)을 걸쳤으며,

그 사이에 우물천장을 가설 하였고 합각부분은 대들보 위에서 측면방향으로 충량(衝樑)을 설치하여 지붕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청계정(淸溪亭)은 낮은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에 원주를 세우고 낮은 마루를 깔았는데,

나무의 기둥으로 보아도 오래된 정자임을 짐작하게 하고,

 

 

 

정면 2칸 중 왼쪽 칸을 방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았으며,

예전에는 뒷면과 우측면에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교창의 창살구멍이 이채로우며,

 

 

 

청계정(淸溪亭)에는 담장과 일각문은 없으며 정자 홀로 단출하게 서있는데,

담장을 대신하여 대나무 숲이 정자를 에워싸듯 둘러싸고 있고,

 

 

 

마루 주위는 평난간을 돌렸는데 난간 아래 호롱병의 장식이 아름답습니다.

 

 

 

정자의 동편에는 앞에 마루를 두고 1칸이 조금 넘는 온돌방이 있어,

 

 

 

일반적으로 정자에 들인 방은 큰마루 쪽으로 분합문 등의 큰문을 내어 두는것이 보통인데,

청계정(淸溪亭)에는 마루 쪽에는 문이 없고 뒷쪽에 작은문과 옆문만 있어 특이하게 보이며,

 

 

 

정자의 마루에는 몆기의 편액이 있어 살펴보면,

시판(詩板)은 보이지 않고 기문(記文) 편액(扁額)만 올려져 있어,

 

 

 

1875년 김상현(金尙鉉)의 "청계정기(淸溪亭記)" 기문(記文) 편액으로,

기문(記文)에는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이자 박희중(朴熙中)의 증손인 박원순에 대한 소개와,

문예(文藝)로 이름나서 동국언자(東國顔子)라 불렸다는 일화와 문제(門弟) 변이중(邊以中)과 이문룡(李文龍) 등과 교유 하였고,

그들이 말했던 청계정의 자세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으며,

후손 박문원(朴文原), 박우상(朴禹相)의 부탁으로 기문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1789년 김성갑(金星甲)의 "청계정기(淸溪亭記)" 기문 편액으로,

하서(河西)의 문인이었던 청계정 주인인 박원순(朴元恂)의 학문적 기량 등에 대한 내용과,

못 가운데 단을 세워 은행나무를 심어 놓고 구곡수(九曲水)가 흘렀다는 등의 옛 청계정 모습에 대한 설명 및,

이로 인해 청계(淸溪)라 명명하게 된 배경 등이 담겨 있습니다.

 

 

 

1950년 14세손 박태규(朴泰珪)가 쓴 중수기문인 "청계정중건기(淸溪亭重建記)"의 기문(記文)으로,

중간에 중수를 하였던 것을 다시 13세손 박정현(朴正鉉) 등이 힘을 모아 중건하게 된 배경 및,

청계정 모습과 기문을 썼던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담겨 있습니다.

 

 

 

1879년 기정진(奇正鎭)의 "청계정중건기(淸溪亭重建記)" 편액으로,

박원순(朴元恂)에 대한 인물 설명 및 개울을 끼고 있는 정자 경관 소개와,

주인이 죽은 뒤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않다가 3년뒤에 열매를 맺었다는 전설이 있는 청계정의 은행나무 전설 등에 대한 소개가 있으며,

한편 그 후손 박문원(朴文原), 박우상(朴禹相)이 후에 청계정을 중건하면서 본인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쓰게 되었다는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1982년에 쓴 변시연(邊時淵)의 "청계정중수기(淸溪亭重修記)"로,

청계정 주인인 박원순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박원순이 죽은 뒤 말랐다가 삼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는 청계정 은행나무 전설에 대한 내용,

그리고 박정현(朴貞鉉), 박보현(朴補鉉), 박응현(朴應鉉) 등이 힘을 모아 청계정을 중수하고,

변시연에게 기문을 부탁했다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청계정(淸溪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노거수 은행 나무와 산동리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자 앞에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서있어.

박원순(朴元恂)이 정자를 지으며 안에는 은행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구곡수를 끌어 들였고,

그 위에는 홍교를 설치해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하나 정자 앞 방죽은 메워져 논으로 변 하였고,

박원순이 죽자 은행나무와 샘물이 모두 말랐다가 삼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습니다.

 

 

 

전남 장성 지역의 마지막 답사지로 찾은 청계정(淸溪亭)에도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청계(淸溪) 박원순(朴元恂)은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인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제자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청계정(淸溪亭)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냈다고 하며,

그의 제자중에는 이곳 장성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화차(火車)와 총통(銃筒)을 발명하여 전세(戰勢)를 만회하고,

역전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1546~1611) 등이 있다고 합니다.

 

 

 

원주의 기둥 하부에 마루와 만나는곳에,

오래되어 헐거워 졌슴인지 마루의 가로목과 기둥사이에 나무 쐐기를 박아둔 모습도 볼수 있으며,

 

 

 

정자의 뒤편으로 돌아가 살펴보면,

마루의 뒷부분도 판재의 문만 두었고 벽으로 막아두어 일박적으로 보아오던 정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며,

 

 

 

뒤편에 나있는 온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는 의외로 작게 해두었습니다.

 

 

 

박원순(朴元恂)이 심어 수령 450년을 넘긴 노거수 은행나무가 압도할듯 높이 서 있으며,

정자 앞으로는 맑은 구곡수(九曲水)가 흐르고 홍교를 설치해 아름다운 정취를 자랑했다는 곳으로,

세월의 흐름으로 이제는 정자와 은행나무만 남아,

명리를 멀리하고 학문수양과 제자를 기르는데 힘썻던 박원순(朴元恂)의 유허 전하는 곳으로,

전남 장성의 정자, 청계정(淸溪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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